붓꽃 독백

붓꽃 독백 - 졸업식을 맞추고

붓꽃 에스프리 2017. 8. 13. 00:10



긴여정을 맞추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학위를 하나 더 받기 위하여서 수업을 시작하던 첫날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 얼마나 불안과 초조함으로 가득하였는지 모른다. 미지에 대한

알지 못하는 낯선 환경과 연속되는 리포트와 논문을 쓴다는 것은 고통중에 고통 이었다.


어떻케 쓰는 지도 모르는 리포트와 논문의 형식을 우리 모두가 배우느라 많이 힘들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그 힘든 시간을 각기 21명이 처한 가정환경과 주변환경을 극복하고

아빠로서 엄마로서 딸로서 아들로서 할머니로서 살림해가면서 고스란히 졸업을 하였다.


이제 마지막 논문 마무리 하나만 남았다.

24일 제출하면 학위는 9월에 우편으로 받는 것이다.

우리 모두 얼마나 많은 날들을 제대로 잠도 못자가면서 숙제를 하고 졸렵고 피곤해 몸부림을

첬던가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월남에서 건너온 카니도 그저께 3시간 자고 숙제를 하고

오느라 피곤해 죽겠다고 하소연을 했었다. 그런 카니도 결국 어저께 졸업했다.




영면하신 어머니 맘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 하는 꽃이 장미다

졸업을 하면서 가장 그리운 사람이 맘과 씨스터 진 이었다.




Simon & Garfunkel - Scarborough Fair & The Sound of Silence



이 힘든 과정을 맞춘 시간에 대한 영광을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씨스터 영전 앞에 그리고

나의 아버지들(어린시절 나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셨던 서울에 계신 8순의 아빠, 오늘의 나를 존재

가능하게 하는 데 가장 공헌한 파파 후레드 그리고 사랑하는 모두를 잃고 인생에서 가장 슬프고

추운 그 겨울을 지내고 오늘 여기 까지 오는 데 온전한 나의 사랑이 되어 주신 아빠 헨리)앞에 바치고 싶다.


그 모진 겨울바람이 불어오던 날들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던 그날들의 고통과 슬픔과 처절함을 극복하고

이렇케 오롯이 나의 길을 걸어왔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울컥 울컥 해지는 것을 몇번이고 억누르고

어제 하루 잘 아이들 부부와 그 아이들을 어려서 길러주던 그 아이들의 수양 이모 써니와 함께

잘보내고 오랫만에 집에 돌아가 시간을 보내고 먼 밤길을 달려 나의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렇케 찬란한 토요일 아침을 맞이한다. 이렇케 살아 있씀에 감사하다.






내 인생 후반에 직장생활 하면서 만나 그 어려운 초보시절 같이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아낌없는 우정으로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지난 5년을 함께한 인생에 둘도 없는 친구 40대 중년의 체리다.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도 하늘이 무너져도 와야 한다고 기어코 

큰딸을 데리고 그 멀고도 먼길과 교통지옥을 지나 찾아와 꽃다발을 전해주고

곧 바로 길을 떠났다. 어려서 3살에 필립핀에서 부모님을 따라서 이민을 왔다.


점심 사먹을 돈을 잊고 깜빡 잊고 가면 뭐 먹고 싶으냐고 무조건 묻고

주고 받는 마음이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점심 한끼 대접할줄아는

그런 친구다. 그 마음은 지금도 그녀나 나나 다 똑 같다. 이해관계가

친구 체리와 나 사이에는 전혀 없다.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나 서로 

도와주고 달려 갈 수 있는 그런 인생의 귀한 친구다.



첫학기 첫 과목을 가르쳐 주셨었던 우리 한국계 미국인 닥터 정이 우리 졸업생들이

가장 초청하고 싶은 교수님 가운데 한분으로 선정되어 졸업식에 참석 하셨다. 

처음 오리엔테이션 하는 날 한국 사람이냐고 묻던 분 이셨었다.


닥터 정은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와 미국 동부에서 성장하고 학업을 맞추고

결혼을 해 우리 지방 서부로 이사를 와서 두 자녀를 낳고 기르면서

세계적인 명문 대학교인 잔스 홉킨스에서 지난해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으로

대단한 인재이시다.


현재 정부기관의 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중요직책에 있으셔서 졸업생들이

근무처에 입사지원을 하는 경우 서류심사에 통과 하도록 서류작성을 도와

주겠다고 제안을 해오셨고 지원자를 찾으셨다. 하여 내 아이를 소개 시켰다.

앞으로 그 아이의 인생에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해주실 수 있는 분으로  아직도

젊고 앞날이 창창한 분이시다. 실력이 먼저지만 우리 미국에서도 누구를

알고 있다는 것은 직장을 들어가는 데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과정을 맞추는 동안 가장 마음이 갔던  중남미 엘살바도르에서 건너와 이 세상의

모든 바닥 인생을 살아오면서 지금은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수없는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는

당차기가 이루 말로 다 못하고 실력이 쟁쟁한 메르세데스 가장 친한 동창생이 되었다.


내가 걸어온 그 힘든 삶을 답습하고 불사조처럼 살아온 그녀의 인생 역정이 가장 많이

나를 감동시킨 부분 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더 마음이 갔었다. 누군가 짓밟으면 기어코

실력으로 패배 시키고 말이 당차고 강인하고 질경이 같고 불사조 같은 여전사다.

오른쪽의 남자들 전쟁을 다녀와 학업을 맞추는 전쟁 영웅들로 애국자들이다.


전쟁 영웅들 가운데 이라크 전쟁과 아프카니스탄에 다녀온 졸업생에게 특별상을

수여 할때 진행자가 감정이 복받쳐 잠시 진행이 안되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절도 있는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그에게 보냈다. 


왼쪽에 하얀 옷의 티나 미국에서 출생한 중국계 미국인으로 참 참하고 조용하고 그런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아주 착실한 사람이다. 그녀 또한 특수분야에서 근무하는 전문인 이다.




입학후 첫날 바로 옆에서 함께 공부를 시작하였던 필립핀에서 이민온 50대 중년의 애니도

함께 무사히 졸업을 하였다. 참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다.




내 아이를 어려서 길러준 아이의 수양 이모 써니와 홍콩 출신으로 어려서 이민와  우리 미국에서 성장하여

내가 한시절 발 디덨던 우리 미국의 최고 공립 명문 유씨 버클리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가서 약학을

전공한 약학박사인 며늘 아이 디니는 우리 미국 해군에서 현재 약사로 근무하고 있다.

아이가 먼길을 일부러 왔다.


요리는 제남편인 한국계 미국사람으로 미국에서 출생한 2세인 내 아이가 하고 며늘 아이는 요리와

살림에는 재주가 없어 세탁과 접시닦기 담당이다. 대신 머리가 명석해 공부와 돈벌이는 누구보다

잘한다. 홍콩에서 태어난 중국인 이지만 한국음식을 오이 빼고는 못먹는 음식이 없어 완전히

한국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매운 음식도 나 보다 잘먹는다.



며늘 아이와 내 아이의 수양 이모 써니와 행사를 맞추고 나와서 바로 2-3 분 거리에 있는 산밑에

집으로 돌아갔다. 더운날 가긴 어델 가느냐고 말렸다. 집안 내력에 없이 머리가 다빠져 60 중반의

늙은이가 더 늙어 보인다. 소년 같았던 애띠었던 모습은 이제 온데 간데 없다.


60을 넘긴 늙은이가 졸업을 하는 사람은 모진 세월을 살아온 이 늙은 이 단 한사람뿐 이었다.

그것도 단 10 명도 되지 않는 동양인들 가운데 한사람.............


그리고 흑인도 단 세명인가 그랬고 나머지는 백인들 내지는 스페인어권 출신 미국인들이었다. 




내가 기른 아이와 며늘 아이의 축하를 받고 긴여정의 이정표 졸업식을 맞추었다.




 내 인생의 전부가 되신 아빠 헨리가 건강 하시던 2년전의 모습이 문득 그리웠다.

내 모든 인생을 받쳐도 아깝지 않은 아빠 헨리가 졸업식에 참석하실수 없어서

가장 슬펐고 아쉬웠고 또 아쉬웠고 아빠를 생각하며 울컥했다




아빠 헨리에게 오늘은 아들이 졸업을 했다고 말씀을 드릴 것이다.

언제나 사람은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고 말씀 하시던 아빠 이셨다.








거의 일년만에 집을 가니 우리 미휘/Miffy가 반가워 어쩔줄을 몰라 했다.

애완동물 이라면 질색인 내가 유일하게 앉아주는 미휘다.

아이들이 외로워 기른다는 데는 반대를 할 수가 없었다.




절간처럼 조용한 동네가 오랜만에 돌아간 집 이었다.

밤이면 늑대가 내려오는 저산에서 늑대들이 내려와 운다,

겨울바람 부는 날 밤에 울면 기분이 스산하다.




아이가 집으로 돌아와 살라는 데 직장이 멀어서 그럴수 없고 은퇴할때 까지

그냥 도시안에 있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다세대 아파트에서 살겠다고  하였다.


절간처럼 조용한 동네 낮에는 다니는 차 한대도 거의 없는 그런 동네라 늘

도둑을 경계하고 돌보아야 하는 곳이다. 동그란 로터리가 있는 집앞

여기 저기 동서남북에서 우리 집 까지 네집만 발코니가 있다.


발코니 있는 집이 좋아 발코니 있는 집을 일부러 샀었다.

벽색도 베이지 보단 우유빛 옅은 노란색이 밝고 좋아 일부러 선택했다.




졸업식을 맞춘후 집으로 돌아와 시원한 벨기에산 맥주와 아이가 담근 김치와 함께 잠시

땀을 중앙 에어컨 올리고 시킨후 나가 오랜만에 집앞 로터리 안쪽으로 있는 공원 의자에 앉아

아이들의 이모와 함께 앉아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100년도 넘었을 도토리 나무가 작은 미니 공원 동쪽편에 우뚝 서있다.




맥주를 마시고 잠시 휴식을 취한후 멀리 저녁식사 하러 멀리 가기는

그러니 저녁에 스테이크나 구워 먹자고 아이의 이모가 제안을 하여서

집 아래 동네에 있는 코스코에 가서 아이 카드 하나 만들어주고

소고기 뉴욕 스테이크와 며늘 아이가 좋아 하는 양고기를 샀다.


지난번에 부엌에서 사용하는 종이타올인줄 알고 잘못산 토일렛 티슈 때문에

페이퍼 타올 한세트, 앨루미뉴움 훠일과 플라스틱 후드 랩, 오개닉 브라운 계란

그리고 마실 물을 사갖고 돌아왔다. 합계 $234 한 25 만원 정도라 할까. 식당하는

아이들 이모가 졸업축하로 지불 하겠다는 것 그러지 말라 하고 그래도 내가

형편이 나으니 가만히 있으라 하고 신용카드로 지불하고 나왔다.




뒤란 한구석에 아이가 고추하고 호박을 심어 놓아 고추가 주렁 주렁 달려 있다.

호박은 늙은 호박이 셋이나 되고 지난번에 아이가 호박나물 해먹으로고 하나를

따다 주고 갔었다. 아직도 다른 것 해먹고 사느라 냉장고에 그대로 있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왼쪽에 뉴욕 스테익과 왼쪽에 며늘 아이가 좋아 하는 양고기를 
식당을 운영하는 아이의 이모가 썰어다 놓고

우리 서양 상추 레러스에 멕시코 중남미 사람들이 먹는 채소의 하나 실란트로에
양념 큐민에 매운 소스 스리라차에 참기름에 약간의 소금 따로 그리고 쌈장에
스리라차 소스와 참기름을 섞어 양념을 만들고 시원한 벨기에 맥주 마시고
다들 배가 불러 포기하고 하루는 마감되었다.

이 늙은이는 도시의 정글 집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곧 바로 피곤해 자고
아이들 부부는 저희들 이모 데려다 주고 밤길 뒤돌아 서서 
산아래 집으로 돌아가고 서로 귀한 추억이 될 하루를 서로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