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하고 나 하고 (140) - 안타까운 마음
그동안 아빠가 페렴으로 입원하셨다 퇴원하신후 전과 달리 정신적으로 정상으로 깨어나시지
못하시고 때론 멍하게 계시고 시선을 쫓아가지 못하시고 이런 신체적 변화로 아들로서 매우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지만 아빠를 바라보면서 때론 얼마나 많은
슬픔과 비애를 느끼게 되는지 모른다. 특히 친자녀들이 자신들 부모님에게 하는 모습을
바라 보면서 때론 실망과 절망 그리고 화가 날때도 있지만 내가 삭이고 넘어가야 할
부분으로 생각한다.
그저께는 아빠의 큰딸 이름하며 누님이 하도 좌골신경통으로 보행이 불편하다고 하여서
내 허리를 고쳐준 친구에게 함께 가 치료를 받고 왔다. 누님은 내려드리고 아빠한테 가니
보조간호사가 난리가 났다. 보아 하니 아빠가 두번째로 정신이 혼동이 오셨는지 아니면
응가를 하고 싶어서 그러셨는지 훌러매트에 앉아 계셔서 침대로 끌어 올려야 할판이어서
난리였다. 일단 보조간호사와 함께 아빠를 침대에 넣어드리고 다시 다 침대를 갈고 정리하고
닦아드리고 나니 보조간호사 말이 조금전에 딸이 왔다 갔다고 한다. 짐작에 뉴욕에 가서
손자 길러주고 있는 셋째딸이 왔다 간것 같았다.
얼굴만 비추고 가려면 왜 왔나 싶어 순간 너무 화가 났다.
조금만 아빠곁에 함께 있었다면 아빠는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려오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가엽은 아빠 곁을 지키다 근무가 있어 저녁식사 챙겨드리고 닦아드리고 기저귀 갈아드리고
돌아왔다. 내일의 근무를 위하여서 잠자리에 들어야 하였다. 바로 어저께 였었다.
그동안이 너무나도 피곤하고 힘든 하루 하루였었다.
꼬박 하루에 세번씩 아빠 식사 도와드려야 하고 잠시 쉴틈도 없엇다.
그리고 때론 근무해야 되고 아이가 천신만고 끝에 국가고사를 합격하였으니 직장도 잡아줘야 하고
어저께 인터뷰를 받게 하고 결국 직장을 잡아 주었다.
인사과에서 발령장만 새해 다음주에 받으면 되는 일이다.
그동안 내가 온갖 힘든 시간을 보내며 닦아 놓은 터전위에 열심히 일하고 근무한 결과가 보장하기에
내 한마디에 아이를 현재 근무하고 있는 직장 특수 부서에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어저께 인터뷰를
즉석 속결로 통과하고 채용결정이 되었다.
내 인생의 모든 짐과 숙제를 맞춘 기분이다.
이제 아이는 스스로 잘 새로운 인생길을 스스로 독립하여 강인하고 또 강인하게 살아가면 된다.
남은 인생살이 보장된 일이기에 남들처럼 직장으로 고민할 일도 이제는 없고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하여서 차근 차근히 이를 악물고 살아가기만 하면 될 일이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한국말처럼 그런 배경이 전무한 나같은 사람이 오로지 성실과 최선과
실력으로만 쌓아 올려놓은 현재의 위치에 오기 까지 겪어야 하였던 그 온갖 힘든 고생을 아이에게는
시키고 싶지 않다. 일부러 사서 고생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침과 점심도 굶어가며 밀리고 밀려오는 업무로 전직원들이 힘들게 시간을 보내야만 하였던
어제 하루의 미친듯한 근무였지만 그 사이에 아이를 인터뷰 장소 까지 안내해 줘야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 가운데 한 순간 이었다. 아이에게 길을 열어주고
나니 아이의 죽은 엄마가 생각이나 눈물이 쏟아질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하루를 맞추었다.
년봉 2 - 3억 짜리 위치까지 가게 아이를 지도해주고 이끌어 주는 것이 다시 남은 과제다.
그럴려면 아이는 대학원에 진학해 더 많은 전문교육을 받아야만 한다. 그럴려면 10년은
잡아야 학위 까지 맞추고 대학 강단에 서서 후진도 양성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제 내 모든
인생의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다.
사랑하는 아빠 아침 식사 챙겨드리고 돌아왔다.
점심때 아이가 제 장모가 와 있어서 함께 점심 식사를 하자고
찾아 오겠다고 하여서 그러마 했다.
저녁에 할아버지 저녁식사 챙겨드려야 하고 내일은 근무가 있어서
피곤할테니 저녁시간은 피하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