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꽃 독백 - 앤 그리고 그동안
먼저 모이기로 한장소로 가니 사업을 정리하고 문을 닫은 상태였었다.
아뿔사 이를 어쩌랴 전화를 하고 서로 소식을 주고 받는 사이에 제나가 도착하였다.
아들 둘 낳아 잘길러 명문 코넬에 보내고 U.C. Berkeley 석사과정을 이수하는 아들을 둔
부부다 워낙 머리가 좋은 사람들로 남편도 그녀도 모두 명문대 출신이다. 그런 그녀가 차밖으로
나오더니 별거 아닌데 받으라며 종이백에 담긴 선물을 건네준다.
직장에 들어가서 우리 부서로 옮겨 와서도 그녀는 아주 비싼 스니커 나이키 보다도 더 비싼 것을
나에게 선물로 사준적이 있다. 물론 그 스니커를 지금도 늘 다른 신발과 번갈아 가면서 신고 다닌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도 선물을 건네주어 이유도 없이 왜 그러나 했다.
앤을 떠나보내고 집으로 돌아아 열어보니 카드와 함께 생일을 축하 한다면서 지난번 뵈었을때 조금은
추워보여서 샀다며 일본회사에서 만들어 내는 유니클로 티셔츠 두개와 양말도 각종류대로 사서 담아
건네준것이다. 도무지 할말이 없었다. 그저 누이 동생이 오빠를 챙겨주는 그런 느낌 이외 어떻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특별히 표현할길이 없었다.
그리고 카톡이 오고 가고 결국 우리는 새로 정한 타운 안으로 들어가 기다리고 있는 아라와 그레타를
만나고 있으니 그리운 앤은 엄마와 여동생과 여동생 남자 친구하고 같이 나왔다.
아라, 그레타, 제나, 코이, 데이빗 그리고 미쎄스 킴 만나 점심 식사를 하고 한참들
그리운 마음 서로 내려놓고 다들 새로운 직장생활에서 겪는 에피소드를 다들 내려 놓았다.
각 지역에서 정상을 가는 명망 있는 직장에 다들 뽑혀 가서 겪는 힘듬은 한결 같이 우리 모두는
그래도 제법 아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였는 데 새직장 수준을 생각하면 아는게 너무 없다는 것이었다.
하여 더 많이 교육받아야 하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 결론들 이었다. 남들 보다 앞서간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요구하고 성실을 요구하는지는 논할 여지가 없다. 세상에 그냥 저절로 노력없이 힘든
시간없이 눈물없이 좋은 보수를 받는 직장은 결코 그리고 절대로 없다고 경험으로 생각한다.
받는 보수만큼 일을 해야 한다.
앤을 다시 떠나보내고 그길로 아빠 저녁식사 챙겨드리고 아이들이 사는 산밑에 집 그 먼길을
운전하고 갔다. 아이 내외가 데리고 가는 대로 갔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린후 언덕바지 정상에
있는 Summit House라고 하는 스테이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 도착했다. 예약제로만 가는
곳이다. 저녁 7시반에 주문을 해놓았고 잠시 기다리는 사이에 우리는 옆에 바에 앉아서 맥주와
칵테일을 시켰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아이가 누나라고 부르는 한국에서 이민을 와서 미국에서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고
다시 한국으로 귀국해 남편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딸을 낳아 그 아이가 이제 국민학교를 다니는
가족들의 친구인 N이 딸과 같이 도착했다. 아이도 맥주를 한잔 시켜주고 있으니 좌석이 났다며 오라고
웨이터가 부른다. 애퍼타이저로 아주 맛나는 빵이 밀빵이 나오고 적포도주 멀로와 정식으로 스테익
하우스 이지만 그 보다 나는 맛나는 파스타가 오랫만에 더 먹고 싶었다. 파스타를 주문하고 있으니
아이들이 작은 상자와 카드를 건네주며 열어보란다.
이카드 겉에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란다.
그리고 안에는 촘촘히 글이 영문으로 그리고 한국에서 온 N은 한글로 글을 썼다.
읽으면서 눈물이 울컥할뻔했다. 아이가 한말은 자신이 지난날 잘못한 것은 잊고 앞만 바라보고 살아가고
오늘의 자신이 있기 까지는 엉클로서 아버지 역할로서 엉클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다는 요지의 글이었고
며느리 아이는 감사한 마음을 어떻케 표현할 길은 글로서는 없다고 쓴 내용이 들어 있었다.
힘들었던 지난간 시간들이 파노라마 처럼 스쳐갔다.
아이들 내외와 한국에서 온 N이 함께 사준 생일 선물은 다름 아닌 아이폰 시계로 몇백불 하는 것이었다.
비싼 것이라고 잊어 먹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알았다고 했다. 첨단기기로 전화도 되고 이메일 하며
아이폰을 차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 파스타 맛이 좋앗지만 정통 이태리 음식을 하는 식당에서 하는 파스타 만큼은 약간 맛이 덜했다.
그리고 달팽이 요리 또한 프랑스 식당에서 요리한 만큼은 맛이 덜했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주 유명한 프랑스 식당과 이태리 식당이 있어 다 아이들과 다녀본 곳이라 미국 음식 정통으로
하는 유명한 곳에서 하는 것이라고 하여도 그 맛이 달랐다.
다음에는 한국에서 온 N을 데리고 그 유명한 작고 아담한 이태리 식당을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 후식 아주 맛났다.
다들 한수저씩 맛을 보고 즐겼다.
그리고 N은 근처에 사는 친구집에서 하룻밤 자고 간다고 갔고 우리는 산밑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같이 아이가 출근하기전에 내가 먼저 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온종일 잠을 자고 와인과 맥주를 마시고 조금 골이 아퍼 반나절 자고 일어나니 가뿐했다.
그렇게 하루를 쉬고 다시 일요일 3년후면 팔순이 되시는 윗분의 초청으로 멀리 다시 갔다.
남의 동네 가는 데 이놈의 waze 네비게이러가 길을 잘못 가르쳐 주어 조금 헤매다 간신히
목적지 은퇴 노인들만 사는 수위가 철저하게 지키는 동네 정문을 통과하니 세월의 흔적인 백발의
윗분이 기다리고 계셨다. 곧 바로 잠시 간결하게 방 한칸과 부엌과 응접실과 부부 노인이 잘 설계된
집을 보고 동네 근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한후 돌아와 벌려놓고 나간
총각김치를 헹구고 버무리고 정리하고 나니 밤 12시반 부랴 부랴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어저께 낳아 주신 작고 하신 부모님을 기려야 하는 날 하루 근무를 맞추고 오늘 하루를
쉬고 있으며 내일 모레 이틀 근무하고 사흘 쉬고 다음주는 계속 나흘을 근무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수습 근무 평가 받고 정식 근무를 머지 않아 하게 될것으로 생각한다.
어저께는 퇴근길에 아빠한테 들려 기저귀를 두번이나 갈아드리고 잠자리 보아드리고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데 음.................이것이 무슨 냄새지 하고 궁금해 아빠 뒤를 조사해보니
귀엽게도 응가를 됨직하게 하나 덩그러니 보셔서 위생패드로 몇번을 닦아 드리고 기저귀 채워드리니
곱게 주무신다. 그 얼굴에 뽀뽀를 몇번 해드리고 발길을 돌렸다.
한달만에 처음으로 오늘은 아침에 밥도 짓고 또 바뻐 썪힐까 보아 큰마음 먹고 줄기콩 요리해 따듯한
밥 한공기를 요기한날 빵만 먹고 살다 뭔가 대단한 날처럼 느껴진다. 어저께는 기온이 급강하 하고
바람이 불어 출퇴근길에 얼마나 추웠는지 힘들었다. 살내에 히러를 처음으로 켰다.
윗분께서는 은퇴준비 철저히 점검하고 특히 은퇴후 의료보험이 연방정부에서 어떻케 하는지 확인
하라 하시며 절대로 자식간에도 누구에게도 남에게도 하지 않아야 할말은 얼마를 내가 돈을 갖고
있느냐 라고 하시면서 나중에 죽을 때 남은 돈과 재산을 아이들에게 주는 한이 있더라도 네자신을
위해 절대로 입을 봉하고 살라 하신다. 일평생 열심히 성실하게 사시고 모은 재산 이름 있는
대학교에 정리해 기부하시고 방 한칸 두 노인이 사는 곳으로 이사 하시고 편히 여생을 사시는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하겠다.
우리 모두 건강하게 잘 있는 것만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열심히 남은 인생도 살겠노라며 베풀어
주신 마음과 생일이 다가온다고 하루전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듣노라니 여기 저기서
다들 배우자들이 병들어 파킨슨병과 치매에 걸려 난리들인데 윗분만 그래도 건강하신편으로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분이시다. 그 또한 우리에게 교훈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