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꽃 독백

붓꽃 독백 - 새벽 4시 13분

붓꽃 에스프리 2019. 5. 16. 22:09



지금은 목요일 새벽 4시 13분 이다.

한국에서 돌아온지 3일째가 되는 날이다. 반세기동안 이번 방문이 다섯번째라고 기억하고 있다,

80년대초 한번 90년대초 은사님 서울 아버지 께서 상처하신후 서울에 나가 아들만 셋인 집에

그당시 연탄 갈아 가며 동생들 셋 데리고 6개월을 산적이 있다. 이불 커버를 뜯어 붉은 다라에 넣고

하아타이 가루비누 풀어 그 추운 겨울에 발로 밟아 가며 빨아 널고 풀 먹여 다리고 이불 호청을

어린시절 어깨너머로 작고하신 모친께서 하셨던 기억을 더듬어 꿰매고 산일이 있었다. 그렇케

모진 세월을 함께 지냐왔었다.


돌아가시기전에 너를 한번 보고 죽고 싶다는 사모님 그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 드릴수 없이 나는 

가난한 학생이었다. 공장에서 근무하고 별별 일을 다 하면서 학업을 남들 보다 2년이나 늦게

맞추어야만 하였었다. 그 어려운 때도 나는 지금은 호주 시드니에서 공인회계사로 살아가는

50대가 된 둘째 동생과 호주 태즈매니아에 사는 막내 대학등록금을 보내준 일이 있었다. 

교사의 박봉으로 세 아들을 대학공부 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여러해를 8월 생신날이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늘 마음의 선물로 $1000 씩을 송금해드렸었다.


그리고 지난해 아빠 헨리를 보내드리고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은사님 서울 아버지의 처조카

사위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국행을 결정하고 그동안 3년동안 인가 얼츠하이머 병 즉 치매를

앓고 계시다는 서울 아버지의 병환을 확인차 위로차 가을날 방문하게 되었다. 아주 짧은

여정 2주 그리고 내년 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바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난

2주반 다녀온 것이었다.


지난 가을에 비교하여서 병세가 많이 진행되었다고 생각한다.

일단 순간의 기억을 되살리시지 못하고 참을 성이 없어지시고 쉽게 노여워 하시고 자신이

하신 말씀이나 생각은 다 옳고 지구는 아버지 자신을 축으로만 돌아가야 하고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리셨다. 뭘 하나를 나누어 먹는 경우에도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싫어 

하시던 아니던 먼저 권해드려야 하고 먼저 드려야만 가만이 계시다. 아니면 자신을 누군가

무시한다고 생각하신다.


호주에 사는 둘째가 600만원 드려서 사사드린 안마 의자도 그냥 놀고 있을뿐 사용을 하시지 

않는다. 행여 누가라도 앉게 되면 금방 얼굴이 우락부락 해지시면서 젊은 것들이 거기 왜 앉아 

있느냐며 화를 내시기 시작하시고 재혼 하셔서 지난 28년을 함께 행복하게 사신 어머님이 

뭐라 하시면 언성을 높이시며 말을 그렇케 하냐며 뭐라 하시고 방으로 들어가시고 만다.


지난 가을과 달라지신 것이 있다면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단한장의 사진도 함께 찍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성격이 변화되셨다. 쉽게 화를 내시고 참을성이 없어 지셨고

방금 식사를 하시고도 우리 식사를 왜 안하냐고 묻는 식이시다. 가능하면 모시고 나가

좋은 시간을 제공해드리고 싶어도 길을 잃을까 보아 두려워 외출을 안하신다. 사시는

근처를 산책하는 정도가 전부다. 해가 넘어갈때가 되면 정신과 전문용어로 Sundown

psychosis가 되어버려 더 혼동하셔서 우리 어머니 어데 계시지 라거나 우리 집에 가야지

바로 여기가 그 예전에 집을 헐고 새로 지은 아파트라고 같은 말을 하루에도 수없이 주변

사람들이 반복해야 하는 일이다.


그동안 북한 함경북도 성진에서 부모님 따라 인천으로 피난 나오셔서 사신 세월 어느낧

만나게 된 신앙 기독교 감리교회 아버지는 일생동안 오로지 한길 교회 이외에는 인생이

없으셨던 분 이시다. 남들처럼 선한의미의 일탈을 해보신 일이 없는 점이 언제나 내가

보는 입장에서 안타까운 점이다. 죽으나 사나 오로지 교회 이외는 삶이 없으신 분 같았다.

수양회 그러다 자식들이 초청해 가시고 여행을 좀 하시고가 삶의 전부이셨다. 정구치는

것을 좋아 하셨고 그게 취미의 전부 이셨던 것 같다.


클래식이나 올디나 한국가요를 듣고 즐기시는 것도 아니고 제자들이나 누구하고 어울리셔서

맥주한잔 정도 하시는 것도 아니셨고 산을 올라 등산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어덴가 외출해

음악회나 미술관 같은 곳을 가보시는 것도 아니고 책도 오로지 교회에 연관된 것들 이외는

안 읽으시고 오로지 하나의 인생 터널만 바라보시고 통과하며 사신 느낌이다. 그 터널 밖에

세상과 그 터널 밖에 다양한 삶을 보시지 않으셨거나 안보려고 하셨거나 못보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상의 그 어떤 대화의 주제도 나눠본적이 없는 그저 정도로 착하게 신앙생활만

하시고 일생을 살아오신 분이다.


다른 신체부위는 모두 건강하셔서 왼만한 사람들 보다도 더 건강하신 분이라 현재로서는

치매 기억력 상실 이외에는 문제가 없어 기약없는 날들을 가족들과 환자 본인께서 보내셔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점차 병세가 악화된다면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성격상 최악의

경우 요양원을 가실분은 더 더욱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점이 주변 사람들이 겪어야 할

기약없는 힘든 시간으로 생각한다. 우리 미국정부에서도 가장 예산문제로 대두되는 병이

치매다. 치매란 기약이 없는 병으로 국가예산이 무한으로 들어가는 가장 최악의 병이다.


암 같은 것은 제한된 삶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 것이라면 치매는 몇년이 걸릴지 모르는 

병이다. 큰동생과 어머니는 내년에 다시 나오라고 하는 것을 도저히 모든 상황이 감당이

안되어 지난해처럼 확고한 답을 주지 못하고 가슴무너지는 아픔과 상처를 갖고 돌아왔다.

또한 도저히 한국의 일상과 삶 그리고 환경에 적응을 할수도 없었다. 반세기를 내가

살아온 영어권의 문화의 차이를 나자신 극복을 할수가 없어 숨이 막혀 죽는 느낌이었다.


한국으로 영구귀국하여 살아가거가 그러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또는 65세 이상으로 국적을 회복하여 이중국적을 갖고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면

나란 사람은 그런 삶을 꿈꿔 본일도 없고 추호도 그럴 의도나 생각조차도 없다. 내가 평생

살아온 현재 내가 사는 이곳이 내고향이며 내가 뼈를 묻어야 할곳으로 생각한다.


2주반동안에 일어난 에피소드는 몇번을 나누어 자판기를 두들겨야 할 일이다. 집으로

돌아와 공항에 도착해 내귀에 들려오는 언어 영어 아 집에 왔구나 하는 그 안도감이

주는 평안과 안정을 표현할 길이 없다. 어저께는 차를 단골로 가는 수리점 메캐닉 샵에

맡기고 한 5리 정도의 거리를 걸어서 돌아왔다. 몸 컨디션이 안좋아 약을 복용하고 일찍 

자리에 누웠다. $2500 주고 차체 사고로 지난해 긁힌것 새차처럼 수리하고 차가 정지한

상태에서 발을 잠시 떼면 쿨렁거리고 엔진이 꺼질것 같이 몇개월전부터 그래 수리를

하려고 해도 못찾아내고 그러다 액세레이터 밟으면 괜찮고 결국 튠업을 해야 한다기에

스파크 플러그를 갈려고 갔었다.


연료분사기, 트랜스미션 용액, 엔진 기름 이것 저것을 종합적으로 갈고 보는 데 거의 $600

그리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앞뒤 브레이크가 25% 정도만 남았다 하여서 모두 

갈아달라고 하니 3시간이 걸려 못하고 차를 두고 가라고 하여서 버스타고 오려다 걸어왔다.

그래서 일까 몸살이 나는 것처럼 아파와 약을 복용하고 일찍 간밤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부터 정상근무를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3주 근무하고 다시 2주 그리고 10월말에 

다시 2주간 유급휴가를 갖는다. 


귀국후 침실에 놓였던 서울 아버지의 사진을 서랍에 넣었다.

도저히 그 모든 상황들이 나로서는 감당이 안되는 일 이었다. 변해버리신 성격과 모든것

지난 반세기동안 내가 알고 살아온 은사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으로 변하시고 계시다. 너무나도 먼나라에서 서로가 살아가고 있고 서로가 다른

문화에서 살아가고 서로가 다른 생활습관과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덧 새벽 6시 10분이 되었다. 오늘은 첫출근하는

날이다. 아침 11시경 수리된 차도 찾으러 다녀와야 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