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꽃 독백

도착 3일째 해피 이스터

붓꽃 에스프리 2025. 4. 21. 08:55

 

지금은 토요일 아침 10시 51분이다. 낯선 땅 낯선 지역에 있는 작고 아담한 그러나 깔끔하고 깨끗한

모텔방에 작은 테이블 위에서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다. 3일간 겪은 일들이 주마당처럼 스쳐간다.

첫날 새벽 6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긴장과 초조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약속한 택시 회사로 전화를 해 정말 제시간에 오는지 확인 전화를 6시 반에 걸었다. 주인이

받으면서 운전사가 곧 전화를 할 것이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좀 있으니 여성 운전사로부터 전화가 곧 도착하겠다고 전화가 왔다. 7시 25분에

나가니 우리 집 앞에 하얀 승용차가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차가 오나 하고 두리번 거리니 살짝

빵 하는 경적소리가 들려보니 바로 앞에 그 하얀 차가 아니던가. 그녀가 손을 흔들며 여기란다.

그렇게 승차하여 공항으로 떠났다. 운전사는 미국 온 지 16년 되었다고 한다. 그녀 또한 중년의

여성으로 40대 말이나 50대처럼 보였다. 사람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 그녀가 하는 말이 택시 운전사와 승객 사이에도 뭔가 맞아야 서로가 아무런 문제 없이

모든 것이 시작이 되고 끝이 난다고 한다. 소히 말하는 큐가 맞아야 하는 것이란 논리였다. 공항은

어찌나 바쁘던지 그녀가 나를 터미널 B에 내려주고 가고 나서 안으로 들어가 드넓은 공간에서

제일 좌측으로 가니 내가 타야 할 항공사가 있었다. 줄에 들어서 티켓팅을 하려는 순간 날벼락이

발생했다. 다름 아닌 내 갤럭시 S25 울트라 전화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택시 안에다 두고 내린 것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마침 한국인 남성 항공사 직원이 안내를 하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했다. 이러이러한 택시 회사 이름을 검색해달라고 했다. 찾았고 연결을 해주었다. 주인과

통화를 하며 여성 택시 운전사 그 차에 전화기를 두고 내렸다고 하니 기다리라며 그 운전사

전화번호를 받아적으라고 하여 받아 적고 다시 항공사 직원이 연결을 해주어 통화가 그녀와

가능했다. 내려주었던 그 자리로 돌아가 기다리겠다고 했다.

교통은 혼잡하고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다행인 것은 아직도 충분한 시간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10분 정도 지나니 그녀가 나타나며 차안에서 손짓을 하고 있었다. 교통이 혼잡해 급히 달려가

전화를 받고 감사 표시로 $40을 주니 손사레를 치며 괜찮다고 한다. 먼저 내려줄 때 택시비 $35

더하기 $14 팁을 주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당황한 나머지 전화기를 찾았다는 사실만이

가장 소중했다. 작은 감사의 표시를 꼭 하고 싶었다. 유튜브에서만 듣던 일화의 주인공이 되어

전화기를 타고 온 택시안에다 두고 내릴줄이야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티켓팅을 하고 보안 검사 줄에 서게 되었다. 6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은 얼굴을

스캔하느라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그리고 신발이나 구두 다 벗고 모든

소지품은 플라스틱 바스켓에 넣고 그리고 랩탑은 따로 내놓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중전화박스

같은 곳에 들어가 양손을 하라는 대로 올리고 엑스레이를 통과하면서 끝나고 소지품은

다시 원위치로 하고 끝났다.

한 시간이 지나 다시 보딩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보딩을 하는 데도 얼굴을 스캔하는 것이

아니던가. 사진 사진의 연속이었다. 쥐샐 틈도 물 샐 틈도 없는 보안 검색이다. 나는 늙었고

이뇨제가 포함된 혈압약을 복용하기에 때론 소변을 보아야 하기에 복도 쪽 가장자리 창가가

아닌 아일에 달라고 했다. 마침 세자리중에 좌측 두 자리는 미국 온 지 16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중장년의 여성분과 그녀의 남편과 더불어 합석하게 되었다. 이제

작은 사업체를 부부가 운영하다 은퇴하고 모국을 방문하는 데 2개월을 있을

예정이고 가족 친척들과 친구들이 있다고 한다.

시작부터 얼마나 잘하던지 남편을 알래르기로 기침을 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고 싸온

과일과 샌드위치를 인천에 도착할때까지 권하는 부부였었다. 착륙후 2개월간 잘 노시다

미국으로 돌아오시라고 하고 배려에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고 나는 미리 먼저 기내에서

나왔었다. 참 좋은 사람들 이었다.

한국을 어떻게 가느냐고 묻기에 어릴 적 친구들을 방문하고 암 수술을 한 분을 만나러

간다고 하였다. 그리고 혈육은 없다고 했다. 이방인이 낯선 곳을 가는 것이다. 항공기에는

가격만큼 볼만한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이 별로 없고 영화가 그것도 한국 것으로 12편인지

있었다. 5편을 보고 중간중간 눈을 감고 있다 보니 한국을 도착하게 되었다. 긴 12시간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조금 더 늙으면 이런 장거리 항공 여행은 못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행기가 내가 어려서 젊은 20대 초반 배 밑창에서 일했던 알래스카 하고도 알류산 제도

북해도 북쪽 러시아 영토 캄차카반도 정도 오니 뜬금없이 문득기수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순간 뒤에 두고 온 직장 친구들과 집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의 고향이 된 그곳이 그리웠다. 그렇게 그렇게

지루함과 긴 시간이 지루할 때 일본 센다이 근처를 비행기가 지나 가기 시작했다.

다시 떠나온 집이 그리워져 여행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지루함에 힘들어할 때쯤 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이 나왔다. 착륙하자마자

이륙을 다시 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관제탑에서 에어 트래픽으로 다시 이륙해 좀

돌다가 와서 착륙하라고 명령이 내렸다고 한다. 서쪽 중국 방향으로 8자 모양으로 15분을

돈후에 착륙하게 되었다. 외국인인 우리의 줄은 말도 못 하게 길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이민국 검사관 앞에 서게 되었다. 오른쪽 왼쪽 두번째 인덱스 휭거 지문을

찍고 스캔하는 사진을 찍고 입국 비자 서류를 검사 후에 입국이 허락되었다.

입국 후 검역 지역을 지나고 나니 짐을 찾는 곳이 얼마나 먼지 다행히 바로 찾게 되었다.

친구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6년 전과 달리 모든 위치가 바뀌어 당장 전화 e-sim을

바꾸어야 하는 데 13번 지역 끝이었다. LG, KT와 SK가 있었다. SK 창구를 선택하고

e-sim을 4월 17일부터 5월 17일까지 무제한으로 구매하니 7만 원 다음은 통화를

받는 것으로 하니 금액이 추가 더하여 9만 원이 넘어 친구가 비싸다며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받고 전화를 하니 미국 전화번호로는 되지 않았다. 다시 자세히

보니 한국 국내 전화번호를 빌려준 것을 몰랐다. 국내전화번호를 한 달간 렌트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가장 작은 내 캐리어와 백팩과 함께 친구 부부와 함께 일단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귀갓길 친구는 일부러 인천대교 반대편 길로 운전을 하게 되었다. 저 멀리

빌딩 숲에도 길가에도 벚꽃이 피어 있었다. 너무나도 밀려오는 피로감에 큰 관심이 없었다.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이 주목적 이어서 그런 것 같다. 친구 부인이 친구네 근처애 사는

S에게 전화를 해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오라고 초대를 했다.

좀 있으니 친구가 도착했다. 얼마나 반갑던지 6년 전 보다 친구는 건강해 보여서 다행스러웠다.

친구가 코냑을 들고 왔다. 그렇게 반갑게 친구 부부와 함께 네 사람이 두 세잔 코냑을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친구는 칠순을 넘기고 공부를 한다면 미리 집으로 발길을 돌려 떠났다. 그리고

좀 지나 친구 부부가 잡아준 택시를 타고 나는 숙소에 도착해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친구

부인의 말로는 딱 일본식 정도의 크기라고 한다.

밖은 너무나도 허름한 여인숙 같은 곳 그러나 들어서 방으로 들어오면 화장실도 깔끔하고

침실도 아늑한 작은 아담한 곳이다. 어저께는 한영 자판기를 찾아 나섰다. 한국을 자주 오고

다니며 한국 사정에 밝은 친구에게 미국으로 텍스트를 보내니 이마트를 가라고 연락이 왔다.

검색하니 지금 머물고 있는 작은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얼마나 헤매었던 지 찾게

되었다. 길을 물어 물어가게 되었다. 길을 물어보면 과거나 지금이나 답은 딱 둘 중에 하나다.

"나는 이 지역에 살지 않아 몰라요".와 네이버 맵을 열어 찾아서 보여주는 사람 내지는

근처까지 시간이 되면 안내해 주는 사람이다. 이마트를 찾고 제일 먼저 한영 자판기를

찾아갔다. 코드가 없는 무선 자판기는 보통 다 10만 원이 넘었다. 그중에 하나 유선 키보드

중에 깔끔하고 디자인과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스타일은 제일 가격이 낮았다. 2만 원이

되지 않아 일단 구매하고 다음은 식료품층에 가니 속된 표현으로 돈이 없지 거의 대부분 

우리가 미국에서 먹고사는 것들을 찾을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일단 샐러드를 두 개 사고 필라델피아 크림 치즈와 빵을 사러 배이커리 섹션에 가니

통밀빵은 없고 다 내가 먹고살면 안 되는 설탕이 많이 든 것들이었다. 단 하나 현미로

만든 빵 로프 하나 집어 들고 당장 마실 물 한 병을 사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마트를

가는 동안 양옆으로 고층건물이 줄줄이요 식당이나 카페 가계들은 끝도 없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일로 목만 돌리면 다 식당이다. 속된 표현으로 돈이 없지 없는 것 없는

세상이 서울이다.

도로의 보도 블록이 울퉁불퉁해서 얼마나 걷기가 힘든지 어저께는 가산 디지털역을 물어

물어 찾아가 2호선 대신 1호선으로 신도림까지 가서 갈아타고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문래역에서

하차하면 되었다. 그 길 가는 것 이 얼마나 나에게는 복잡한지 제일 힘든 것은 출구 찾기와

방향 알기다. 거미줄 같은 서울의 지하철은 내려가 하나뿐인 지하철 노선을 다니는 우리 같은

미국 도시 사람에게는 힘들다.

그랬더니 평생을 일본 회사에서 근무하다 그만둔 내 단짝 친구가 하는 말은 일본 가면

너 같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복잡하여 일어를 잘하는 자기도 힘들다고 한다.

어저께 이마트를 다녀오는 길에 친구가 전화를 했다. 어데 있냐고 하며 점심같이

식사하자며 초대를 했다. 갈 일이 태산이었다. 지금 있는 숙소에서 1호선과 2호선 다 거리가

있다. 1호선이 가까워 보여 가려니 가다 종아리에서 쥐가 나서 어느 중간 대형 빌딩 앞에

벤치가 주르륵 있어 할 수 없이 앉아 쉬게 되었다.

간신히 간신히 쥐가 나서 아픈 다리를 끌고 가리봉동 디지털역에 도착해 신도림에서

내려 물어 물어 2호선을 갈아타고 문래역을 가니 친구가 집에서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어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이미 나는 이마트에서 사갖고 온 샐러드와 빵으로 요기를 하고

갔는데도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는 친구와 친구 부인의 권유로 곰국에 조금 밥을 말아

요기를 하게 되었다. 다시 발등과 오른쪽 종아리와 무릎 위에 허벅지에서 쥐가 나 비명을

지를 정도로 뒤틀려 오고 아파졌다.

친구가 달려들고 부인은 침으로 오른쪽 발가락을 따고 피를 짜내고 다리를 주무르고 파스를

부치고 전기장판을 틀고 나서야 한참 지나 겨우 서서히 풀려 움직일 수 있었다. 집이

너무나도 간절히 그리웠다. 집에서는  어쩌다 있는 작은 쥐나기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결국 친구 부부는 나를 혼자 보낼 수 없어 같이 2호선에서 1호선을 갈아타고 네이버 지도를 펴고

찾고 찾아 나를 숙소에 데려다주고 그길로 직진해 2호선으로 돌아간 후 집에 잘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도로의 평면이 작은 블락으로 만들어지고 언덕지거나 높낮이가 달라 발바닥과

다리 종아리 근육에 자극을 많이 주고 일자 평면으로 된 미국의 보도와 달라서 그런 것은

아닌지 싶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 샤워를 하고 나는 처음으로 긴 잠을 잘 수 있었다. 한국 방문 후 처음으로

어저께 구매한 한영 자판기로 두들겨본다. 지하철은 너무 깊어 걸어 올라가야 하는 층계가

너무나도 많고 보도는 울퉁불퉁해 발이 아프고 하다 보니 쥐가 나고 말았다. 오늘도 잠시

외출하려니 종아리가 뻐근해 쥐가 날까봐 걱정스럽다. 그리고 이마트 가서 내일 먹을 샐러드를

사갖고 와야 하는 데 이 또한 한참을 걸어가야 해 걱정스럽다.

손톱깎이 네일 클리퍼는 어데서 살 수 있는지 그것도 모르겠다. 오래전에 버어지니아 공항에서

손톱깎이를 검사대에서 빼았겨서 이번에는 아예 갖고 오지를 않았다. 집에 자그마치 4개나 있지만

여기는 타향이 아니던가. 50년도 넘는 긴 세월을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하는 영어속에서

살다 이제 은퇴하고 죽마고우를 찾아 오게 된 이 먼길 창밖은 흐린지 유리창이 어둡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