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년중 5주 유급휴가 가운데 첫 2주 유급 휴가도 끝을 향해간다.
다음주 화요일 이면 직장으로 복귀한다.
그동안 2개월간 쉰 먼저 직장 어쩌다 한달에 한두번 근무해주는 옛직장 그래도 그곳에서
많은 것을 이루었고 이 먼길 까지 오게된 곳이기에 다른 직장에서 더 많은 보수를 주겠다고
했어도 그동안 몇번이나 거절을 했었다.
세상살이가 돈이 없으면 안되는 물질만능의 시대라지만 긴 안목을 생각하고 사람은 언제나
수신제가 평천하를 잘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달다고 삼키고 쓰다고 뱉고 그런 사람의 태도는
긴 여정의 끝이 없다. 어려울 때 길을 열어준 사람들 기관들 또 누군가 길이 필요해 열어주길
청탁해올 때 길을 열어주라고 부탁하면 사람 하나 믿고 길을 열어준 사람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평소 살아가는 일상의 자세 가운데 하나다.
보스를 만나러 갔다.
지난번 일년에 한번 받는 교육 받으러 가니 누군가 보스를 붙잡고 반시간이 되도록 놓아 주지
않아 참다 참다 성질나 발길을 돌려왔었다. 그 사이 2주 유급휴가를 연방정부 직장에서 하고
있는 동안에도 몇번이나 근무 해달라고 먼저 다니던 직장에서 전화가 온것을 응답을 해주지
않았다. 지칠대로 지친 내 육신도 휴식이 필요 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하여 어저께 아침에 아빠 아침식사 봉양해드리고 그길로 먼저 직장을 찾아 갔다.
살아 있다고 신고식 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얼굴 내밀고 보스 사무실을 찾아 가니
기암절벽을 하기 직전으로 반색을 하며 뭐하다 이제 오느냐며 몇번이고 네 이야기를
했었다며 반갑다고 했다. 지치고 지쳐 쉬었다가 잊지 않고 있다고 얼굴 이라도 보여줘야
할것 같아서 왔다고 하니 우스워 죽겠단다.
더도 들도 말고 한주에 하루만 근무해달라고 조른다.
다음주 화요일 연방정부 직장에 복귀하고 근무날자 보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연방정부 직장에 연결해준 두 전직장 동료들은 이제 입사 수속이 거의 다 되어가 곧 신참교육을
받는 정식발령을 곧 받게 될 것 같다. 직정 인사과에서 연락이 왔다. 참고인으로 고용해도 좋은지
지원자의 자젹을 재확인 해달라고 하여 이메일로 답을 보냈다.
전직장에 가니 다들 연방정부 직장에 길을 놓아 달라고 목에 매달려 자격이 되지 않으면 소개를
해주고 싶어도 할수가 없다고 딱부러지게 선을 그었다. 아빠가 있는 요양원 직원들 가운데
그레이스도 학부에서 전문교육을 받고 있는 딸 졸업하면 먼저 직장에 취직시켜 달라고 부탁을
오래전부터 해와 졸업하고 내가 보아 다부지고 빠릿 빠릿하고 똑똑하면 직장을 잡아 주겠노라 했다.
경쟁력이 있고 살아 남을 수 있는 강인하거나 똑똑하지 않으면 취직을 시켜주어도 살아남지
못해 아무나 해줄수는 없다. 내눈에 들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나는 엄격 하면서도 세밀하게
가르쳐 주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하여 좋아 하면서도 무서워 하는 사람에 속한다. 제대로
근무 안하고 얼룽뚱땅 하는 꼴을 나는 못본다 그리고 잘난체 하고 말이 많은 사람 제일 싫어한다.
겸손하고 묵묵히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이 좋다. 그리고 선이 분명하고 유두리 있는 자세를
갖고 있는 두뇌 회전이 잘되는 유능한 사람이면 더욱더 잘 가르쳐준다.
아빠가 계신 요양원에 에치오피아 에서 온 아빠 담당 보조간호사가 있다.
그녀는 무척이나 성실하다. 에치오피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아프리카 사람들 치고는 나이제리아
출신과 더불어 교육에 많은 신경을 쓰고 똑똑한 사람들이 무척 많다. 나이제리아 출신들은 대체적으로
잔머리를 잘굴리고 사기성이 높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거나 대부분의 경우 근성이 선하지 않고 나쁜
반면 에치오피아 사람들은 근면하고 교육에 열심이고 부지런하고 아프리카 출신 국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성실하다. 늘 힘든 일 노인네들 대소변 기저귀 갈아주고 목욕시켜주고 아침 저녁식사 도와주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임금에 시달리고 일은 힘들고 허리는 물론 전신이 쑤신다고 한다.
하여 나는 그녀 허리와 다리가 안아프게 하는 좋은 신발을 하나 사주기로 작심을 했다.
물론 한두푼 짜리가 아니다. 거의 200불 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깝지 않다. 나는 그저 몇시간 근무하면
사줄수 있는 것이다. 그런 위치에 오기 까지 얼마나 힘든 역경과 시련을 보냈는지 모른다. 서울에
계신 어릴때 은사님 이시자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자궁암으로 돌아가시지 보름전 너 보고 죽고
싶으니 한국으로 나오라고 한것을 나는 그때 너무 가난해 비행기표도 살수 없어 끝내 못갔다.
그리고 스승님의 배우자 이시자 사모님 그러나 나에게는 어머님은 돌아가셨다. 후일 모국에
돌아가 용인 공동묘지 어머니 묘소에 지금은 호주에서 사는 둘째 동생하고 같이 가서 얼마나 나는
슬퍼 목놓아 우는 것이 아닌 울부짓었는지 모른다. SAS 발을 편하게 하는 근무 구두를 아프리카에서
온 아빠 헨리를 극진히 돌보는 그녀에게 사주고 싶다. 내가 덜 입고 덜 먹으면 행복을 피부색도
다른 이 지구상에 누군가와 나눌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청소부 부터 식당 부엌 보조부터 어선 배밑창에서 남의 집 풀 깎아주고 아파트 집 페인트 칠해주고
공장에서 조립하는 공돌이 부터 세상에 안해본 일이 없는 내 젊은 날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 일이다. 그 힘든 날에도 나는 내꿈 스탠포드 대학교나 U.C. Berkeley에 들어가 세계 인재들과
경쟁하는 것을 잊어본적 없다. 결국 후일에 나는 그중에 한 학부로 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지만 학비가
없어 중도에 자퇴하고 몇년을 다시 노동을 한후 남들은 4년에 졸업하는 학부를 6년만에 맞추고 후일
영국으로 건너가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는 파란만장한 지난날을 지나왔다. 그리고 늙은 나이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 지난해 다른 학위를 수료하고 지금은 세상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장에서 내 인생 마지막
직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세대들이나 후배 세대들 자녀들의 앞날을 열어주고 직장을 잡아주는
일을 직장근무 이외에 하고 있다. 그러기 까지 입을 것 먹을 것 다 자제하고 오로지 강인하게
모진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다. 나는 한국인의 자손 이기에 포기 할 수 없었다.
유대인 이기에 살남아야 하듯이 한국인 자손이기에 살아 남아야 한다는 일념 이었다.
때론 정말 피곤해 이대로 계속 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도 잘수가 없다.
그러면 자신의 의지대로 이제는 못하시고 계신 아빠가 제대로 식사도 못드시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면
부서질것 같은 나의 육신을 일으켜 세워야 하고 해내야만 했다. 그리고 진행형이다. 나를 낳아주시고
아니고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내게 아버지가 되어주신 아빠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
분명한 것은 지극히 높으신 그분은 아시고 나의 건강을 지켜 주시고 나 또한 건강유지를 위해
절제하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기운이 나시는지 어제 오늘은 몸을
일으켜 세우시고 그러셔서 또 좋으면서도 칰대에서 떨어지시는 일이 생길까 보아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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