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고 나
순수한 영혼의 사색과 사랑 그 영원한 삶의 에스프리

붓꽃 독백

붓꽃 독백 - 인생 그 영원한 삶의 에스프리 참사랑 (2)

붓꽃 에스프리 2013. 7. 3. 01:44

 

지금은 화요일 새벽 6시 한국시간으로 화요일 밤 10시다.

어저께는 새직장으로 첫출근날 이었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낯설고 어색하기 그지없다.

익숙하기 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하나 둘 셋..............일단의 적응 기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첫근무를 나가니 씨스템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아 손 스캐닝이 되지를 않는 것이었다.

 

출근하자 마자 그대로 하나의 전쟁이라고 할까 시간과 사투를 벌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남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에 긴 1시간의 휴식 시간이 되었다.

 

전날 현직장 근무를 맞추고 밤이 이슥해 아버지 집에서 돌아와 더위속에 늦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 3시반에 일어나 아침을 가볍게 하고 그대로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도착하니

15분전 새벽 5시 그대로 현장에서 볼 것도 없이 강행군을 시작하였다.

얼마나 되었을까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휴식 시간이 되어 직원 휴식공간에 들어가 보니 이것은 완전히 뭐 캠핑을 온 것과 같았다.

각자 사물함과 냉장고에서 이침을 먹기 위해 우유부터 각종 씨리얼은 물론 온갖 것들이

등장을 하고 있어 나로서는 경악을 하고 말았다. 마치 전쟁터나 재난을 당한 곳에서

살아가는 비상체제 같은 모습들 이라고나 할까 그런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침을 밝았고 또 점심 시간이 되어 직원 휴식공간을 들어가 보니 이번에는

더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각종 점심이 등장하였다. 인도 출신은 커리로 만든

닭고기와 채소들, 남미 출신은 남미 음식 동양 사람은 쌀밥에 자기 고유 음식을

점심으로 먹는 것이었다. 우리처럼 빵과 치즈나 볼로냐로 샌드의치를 먹는 직원은

드물었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점심 식탁이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에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매니저를 만나 항체 혈액검사후 씨스템에 이름을 넣고 오른 손을 스캐닝 하고

첫날이라 다른 직원들 보다 조금 일찍 퇴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퇴근했다.

주차장에 세워 놓은 자동차는 그야말로 화덕 같이 더워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모든 창문을 다 열어 제치고 통풍을 해도 더웠다.

 

집에 도착하자 마자 모든 창문을 열어제치고 환기를 하고 그대로 카우치에

쓰러져 잠을 자니 전화벨이 울려 받아보니 아이들이 오겠다고 하면서 저녁을

냉명으로 같이 요리해 식사를 하자고 하였다. 전화통화가 끝나고 다시 누워

잠을 정신없이 자니 꿀맛 이었다. 그러나 꼭두 새벽부터 긴 12시간이란 근무를

맞추고 돌아오니 누워 있으니 배가 고파왔다.

 

아이들은 소식도 없고 시간을 보니 밤이 깊어 8시가 넘었다. 할 수 없이

일어나 김치 비빕밤을 만들어 후라이 하고 있으니 아이들이 창밖에서 엉클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뭐를 한 보따리씩 들고 오고 정신이 없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돌아간 후 보니 뒤란에서 기른 애기 머리만한 둥근 호박과 오이와

고추등을 따서 들고 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작은 아이가 부엌으로 들어와 냉면을 냄비에 끓이는 동안

나는 김치 비빔밥을 만들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집에 없는 사이에 이웃과

벌어진 작은 불미스런 이야기를 작은 아이가 들려주고 있었다. 화가 불끈 났다.

아니 워니타가 제가 뭔데 내가 없는 사이에 남의 집에 와서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러 하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앞으로 두번 다시 엉클이 집에 없는 사이에 다른 사람을 집안에 발을 딛게

하면 가만이 안 있겠다고 아이들에게 경고를 하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특별한 일이 아닌한은 남을 집에 들여 놓지 말라고 좋게 타일렀다.

 

그리고 싫어도 이웃과 그냥 최소한의 인사는 상대가 하면 주고 받되

응수는 필요 이상으로 하지 말라고 하였다. 지나친 응수나 필요 이상의

대화가 문제로 발단하는 예는 얼마던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가능하면 싫다는 표시를 얼굴에다 하지 말라고 하였다.

직장에 가서도 성질 다 부리고는 단체생활을 할 수 없기도 하여 때론

싫어도 내색을 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도 필요하다 타 일렀다.

물냉면과 김치 비빔밥으로 오랜만에 아빠를 막 암으로 잃은 조카 며느리가

될 드니와 내아이 둘과 함께 감사한 마음으로 저녁을 맞추었다.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작은 아이가 제 형에게 엉클이 앞으로 누구든지

집안에 발 딛게 하지말라고 한다고 하며 말을 한다. 큰 아이에게 순간

좋케 다른 사람을 함부로 집안에 들여 놓지 말라고 타일렀다. 엄마가

살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을 하고 어디라고 감히 워니타가

내집에 와서 언성을 높이느냐고 그런 일은 두번 다시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어디 까지나 흑인은 흑인이고

백인은 백인이고

멕시컨은 멕시컨이고

미국에서 태어 났어도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이지 근본이 변할 수 없다라고 말을 하였다.

그러니까 모든 언행과 행동에 늘 조심하며 살아가야 마땅하다고 말을 하였다.

 

오래 우리와 함께 살던 세입자가 나간 방을 아이들이 보고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여 가보니 전기를 이미 끊고 가서 어둠속에서 볼 수

없어 밝은 대낮에 보기로 하고 큰 아이가 열쇠를 주고 갔다.

 

떠나면서 작은 조카 며느리가 될 드니가 그냥 나가니 작은 아이가 제 부인이 될

약혼자 드니를 불러 세우고 엉클을 안아주지 않고 어디를 먼저 나가느냐고

한마디를 하니 들어와서 엉클 잘 있으라고 하면서 안아주고 나갔다. 그리고

작은 아이는 나가면서 볼에 키쓰를 해주고 또한 나는 그 아이 볼에다 잘가라며

따듯한 키쓰를 해주었다. 서양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니

문화정서가 달라 인사하는 정서 표현도 한국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르다.

 

아이들이 떠나간후 디쉬 워시를 하고 밤이 깊어 아버지께 안부전화를 드리니

받으시면서 오늘은 어떻게 지냈니 하신다. 별탈없이 근무하고 돌아왔노라고

말씀드렸다. 덥다 하셨다. 노인들에게는 참 힘든 날씨다. 화요일은 휴무라

점심에 아버지께 물냉면을 해드리려고 한다.

 

밤새도록 카우치에 누워 잠을 자다 생전 처음 샤워도 하지 않고 침대로 들어가

잠을 자다 눈을 뜨니 새벽 5시반 소피를 본 후 그대로 샤워를 하고 이렇게 하루를

정리하며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다.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높은 파도와 같다.

그리고 정면 돌파를 하여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래도 아버지가 옆에 가까이 살고 계시니 큰 축복으로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위로와 힘과 용기가

되는지는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일로 생각한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헨리.......

늘 한결 같은 마음으로 아버지 살아 생전에 온전히 따듯한 손길로 내몸 같이 돌보아

드리리라 이 아침에 다시 생각하며 자신에게 다짐을 한다.

 

참사랑은 가치에 있어서 고귀하다.

그런 만큼 세상에 흔한 것이 아닌 귀하고 귀한 것이다.

존엄성과 숭고한 순수와 더불어 헌신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