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목요일 저녁 6시 7분 지난여름 끝에서 만나고 아직도 만나보지 못한 친구
사무실로 오랜만에 놀러 가려던 차 근무가 있어 신년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일로
웃어른께서 시간 되면 내려오라고 연락이 왔다. 겨울비는 철철 내리는 날 밤에
하여 내일이나 모레 시간이 되시면 방문하겠노라 하였더니 수요일은 바쁘니
목요일에 만나자 하여 오늘 아침 샤워를 하고 아침 식사도 거르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 고속도로 진입로를 막아 놓았다. 할 수 없이 방향을 틀어 북으로
올라가 다시 출구로 빠져 남쪽 방향 고속도로로 진입하여 간신히 교통지옥이 가장
심한 도시 중심을 반 시간이나 걸려 겨우 벗어날 수가 있었다. 얼마 전 한 병에 13불
정도 하는 들기름을 8불 조금 넘게 세일하기에 5병 사서 하나는 아이 주고 두 병을
들고 가 하나는 쓰시고 하나는 사돈어른 드리라고 말씀드렸다. 다행이 오늘은 비가
오지 않고 날씨가 화창하지는 않았지만 지낼만한 날씨여서 좋았다.
왕복 56마일 90킬로 미터가 되는 거리를 다녀왔다. 늘 그렇듯이 점심 식사 대접
해드리고 발길을 돌려 돌아왔다. 걷는 것만이 건강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만나면
늘 말씀하셨듯이 오늘도 그러셨다. 심장수술 19년 차 철저한 자기관리로 이제
80을 넘기시고 친손주 2명에 외손주 2명을 두신 세월이 되어 할아버지가 되셨다.
만나면 늘 은퇴하면 갖고 있는 현금은 장기 고금리로 묶어 두라던 가 은퇴연금은
매달 지급받는 것으로 하라던가 건강 유지를 위한 걷기 운동을 하라는 것등 늘
강조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어른의 친구분 마나님께서 얼마 전 평생 돈 벌어놓고 딸 둘
낳아 교육 잘 시켜 전문직에 종사하고 집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촌에 살고
하지만 얼마 전 파킨슨병을 장기간 투병하다 작고하셨다. 하여 웃어른의 둘도
없는 친구인 바깥분이 그 큰집에서 큰딸이 잠시 엄마 돌보느라 들어와 살던 것을
외로우니 제집으로 가라 하지 말고 그대로 같이 살라고 하셨다는 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신다 말씀하셨다.
점심 식사로 웃어른 두 분은 비빔냉면과 삼계탕을 주문하셨고 나는 윗분의 권유로
보쌈정식을 시켰다. 그리고 해물파전을 하나 시켰다. 늘 만나면 나는 해물파전을
하나 시킨다. 어떤 때는 한국말이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늘도 그놈에 해물
파전이 생각이 순간적으로 나질 않아 코리언 팬케이크를 해달라고 하니 주문을 받던
웨이트리스가 해물파전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어려서 와서 평생을 영어만 하는
나라에서 살다 보니 한국어를 유창하게 해도 어떤 특정한 것은 한국어로 알지 못해
도리 없이 영어로 표현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식사를 하면서 나눈 말 식사를 맞추고 집으로 돌아와 나눈 말이 처음도 마지막도
웃어른 두 분은 돈 처 쌓아 놓지 말고 이제는 하고 싶은 것 하고 남은 인생 건강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라고 귀에 딱지가 않도록 말씀을 하셨다. 어른의 친구분의
부인의 경우를 보아도 그러니 제발 돈 생각하고 내년까지 근무하지 말고 사회보장 연금
매월 지급액이 변하지 않는 한은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올 안으로 은퇴하라고 두 분이서
채근을 하셨다. 은퇴해 한국도 방문하고 어려서 추억이 남은 곳도 방문해 보라
말씀하셔서 내년에 은퇴하고 싶다 하니 그러지 말라고 극구 만류를 하셨다.
은퇴하면 어떤 계획으로 살 거냐 하셔서 나는 1년간은 여행을 하고 그다음은 다시
대학교 학부에 진학해 순수미술을 공부할 것이라 말씀드렸다. 아니면 내가 돈이
없어 입학 허가를 받고 자퇴하고 포기했던 우리 미국의 최고 명문 학부 중에 하나인
학교로 돌아가 미술사를 공부하던지 그러고 싶다 말씀드리니 그도 나뿐 생각은
아니라고 하시며 건강을 잃으면 돈도 명예도 다 소용없으니 무엇보다 걷기 운동을
하라고 거듭거듭 강조하셔서 알았다 말씀드렸다.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혜롭게 자신과 주변을 위해서 어떻게 쓰냐는 더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웃어른을 통해 생각한다. 평생을 공무원 생활을 하시다
은퇴하시고 평생 모은 재산의 일부를 아주 오래전에 이름만 대면 미국 사람들이
다 아는 명문 대학교 재단에 기부를 하셨다. 그리고 웃어른의 작은 처남 되시는 분은
보성중학교 때 한국 전쟁후 한국을 떠나와 미시간 공대를 나와 미국의 최고 MBA
명문 코스 와튼 스쿨을 나오셔서 자수성가를 하신 미국에서 저명한 기업인이다.
오늘 그분이 전문잡지 기사에 나왔다며 잡지를 하나 갖고 가라고 주셨다. 70 중반
이신 그분 모교 졸업 연사로 오래전 초청되어 졸업식에서 연설을 하셨고 지금은
첨단 IT 기업의 소유자 이자 CEO로 재직 중이시고 참 많은 사회 곳곳에 기부를
하시는 분으로 인물 또한 세월의 연륜이 쌓여서 일까 참 남자인 내가 보아도 출중
하시다.
형제들과 우애가 대단히 돈독하신 분으로 뉴욕에서 방만 30개가 넘는 대저택에
사시는 분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겸손하고 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실 수가 없어
주변에서 모범이 되시는 분이다. 뵈 온 지가 십수 년은 넘은 것 같다. 얼마 전
훌로리다에서 형제들 다 모여 휴양지에서 같이 휴가를 보내며 우애를 다지는
시간을 보내셨다고 한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 홰이스북에 올리고 한 것을 다른
사돈 집안에서 보았다고 한다.
하여 바로 그 집안은 형제들이 모두가 서울대와 미국 명문대학교 출신으로 대학
교수에 의사에 다 미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사람들로 두뇌 하면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운 수재들만 모인 집안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가정은 형제가 4명인지
5명인지 그런데 형제들 가운데 두 가정이 이혼을 한 가정이 되었다며 오늘도
위에 어른이 다시 가풍과 형제들 사이에 우애가 얼마나 중요한지 한 말씀하셨다.
학벌이 전부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 더 중요한 인격의 잣대라고 하시면서
결론을 내리는 대화의 결말이었다.
그런데 그 집안이 얼마 전 다른 사돈 가정의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미 전국 각지에 사는 형제들이 모여 단합되어 같은 우애를 다지는 시간을 같게
되었다며 선한 영향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씀하셨다. 다들 60년 70년을
미국서 사신 분들이라 이런 경우를 미국 가정이라고 해야 할지 한국 가정이라고
해야 할지 솔직히 나도 정의를 내리지 못하겠다.
2세들은 이미 50 줄이고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이다. 나 역시 직장에서 온종일
영어만 하고 한국어는 여기 이 온라인 이외에 사용할 기회가 전혀 없다. 한국말을
할래도 할 사람이 없다. 오늘같이 웃어른 뵙고 돌아오는 길에 한국 식자재 마켓이나
들려야 계산대에서 겨우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의 한국어 사용 기회다.
집에 돌아오니 아이로부터 텍스트가 사정이 있어 날아와 답을 보내니 전화가 왔다.
아이도 나도 한국어 반 영어 반으로 대화하다 결국에는 내가 속이 터지고 더 편리한
영어로 대화를 맞추었다. 이것이 우리 같이 어려서 한국을 떠나와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 두 문화를 살아온 나 같은 사람과 미국에서 출생하여 살아온 사람들의
현실이다. 그런데 나는 토속적인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 누가 한국을 폄하하면
나는 눈을 부릅뜨고 다 까 세우고 만다. 그리고 당당하게 나는 한국인이라고 말을 한다.
웃어른을 뵈러 가는 데 직장에서 텍스트가 날아왔다. 가외 근무를 해줄 수 있느냐고
정중하게 나는 지금 한국으로 말하면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있다고 응답을 하고
미안하다고 텍스트를 보냈더니 응답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텍스트가 날아왔다.
하루 가외 근무해 주면 남들 2주간의 급료가 되는 고액을 받지만 오늘도 제발
나이를 생각해 가외 근무하지 말라고 위에 웃 어른 두 분이서 극구 만류를 하셨다.
그러다 병들고 고생만 하다 죽으면 인생이 그게 뭐냐고 친구 부인을 보라시며
그렇게 돈이 많으면 뭐 하며 좋은 집에 살면 무슨 소용이며 자신은 즐기지도
못하고 병들어 죽고 말았지 않느냐고 하시면서 절친의 마나님 이야기를 하시면서
제발 그러지 말고 이제는 은퇴하고 하고 싶은 것 하고 여행도 가고 싶은 데 다니고
그러라고 또 한 말씀들 하셔서 알았노라고 말씀드렸다. 더도 덜도 아닌 내년
봄까지만 근무하겠노라고 말씀드렸다.
4월에 두 분이서 인생에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모국을 방문하실 예정이라고 하시면서
이번에는 마지막 방문이 될 것이라 한 사람당 $4500 하는 비즈니스 클래스로
비행기 표를 이미 예약해 놓았다고 하셨다. 마지막 이란 말에 왠지 모르는 슬픔
같은 감정과 고독이 밀려왔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토록 인생이 허무할 수가 없다.
어려서 와서 벌써 70 노인이 나는 되었다.
부모님 형제들 다 세상을 떠나시고 이 땅 아메리카에 내게 남은 유일한 혈육 그리고
혈육 한 점 없는 나도 잘 모르는 모국이 가슴에 밀려왔다. 은퇴 후 모국을 방문해
한국을 배우고 알고 싶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지난날 어린 시절 한국에서의
추억들과 그 시대 한국의 정서가 그립다.
돌아오는 길 미국 마켓에 들려 바게트 빵 두 개, 그리스식 피타 빵 한 봉지, 2.8리터짜리
랙토스 뺀 우유 하나 코니 냉동 약병아리 2개, 냉동 새우 작은 봉지 하나 사고 다음은
한국 식자재 파는 마켓에 들려 세일하는 오리지널 삼양 라면 5개에 세일해 3불 안 되는 것
2개, 샐러드용 유기농 스프링 믹스 채소 준비된 것 하나, 세일하는 준비된 햇반 같은
밥 한 상자, 토마토 3개, 먼저 담근 총각김치 맛나게 다 먹어 다시 담그려니 물가가
올라가 전보다 한배 반이나 올랐지만 3단 구입 후 돌아왔다.
4일 쉬고 내일은 근무 첫날 또 3일 근무 해주고 4일 쉴 때 다음 주는 반년 만에
친구를 만나러 갈 예정이다. 도대체 물가가 왜 이렇게 올라갔는지 프랑스 파리
교외에서는 3개인지 5개에 유로 3불도 안 하는 바게트 빵이 우리 동네 마켓에서는
하나에 오늘도 여지없이 2불 69전이다. 하나에 3천 원 결국 두 개에 6천 원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오늘 하루가 지나갔다.
'붓꽃 독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 아침 (2) | 2023.01.22 |
---|---|
잠시 겨울비는 멈추고 (2) | 2023.01.21 |
1일 1월 2023년 그 유럽 (5) | 2023.01.12 |
For you (0) | 2023.01.01 |
새해 벽두 한 편의 시와 함께 (2) | 2023.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