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ndinsky - Paintres
돌풍에 길가에 주차해놓은 자동차 위에 나뭇가지가 부러져 내려
차를 망가트리고 정전사태가 일어나고 주택들 지붕이나 상업건물의
간판들이 땅에 떨어져 나뒹굴고 길은 부러지거나 떨어진 나뭇가지들로
어지럽고 돌풍이 지나간 자리는 흔적조차도 을씨년스럽다.
돌풍이 지나간 뒤에 남은 것은 눈부신 햇살이다.
언제 돌풍이 불었느냔 듯이 또 다시 봄 날씨는 살포시 얼굴을 내밀고
기웃거린다. 지구온난화로 과거 70 - 80년대는 겪어보지도 못한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일기변화로 계절조차도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
전 같으면 이쯤이면 채송화 같은 모양을 한 이름도 모르는 분홍빛이나
샛노란 꽃들에 파묻혀 살 텐데 구경조차도 힘든 요즘이다. 물가는 오르고
그 어느 때 보다 도 도시인으로 살아가기가 벅찬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물질문명의 이기와 광고의 범람으로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어지럽고 현기증을 느끼고도 모자라 때론 느낌조차도 없다.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문명의 이기에 의하여 조정되어 움직인다.
예기치 않은 일로 장장 13시간을 시속 140km로 운전하고 원치 않는 먼 여정에
올랐다 당일치기로 돌아온 이틀간은 계속 조름이 와서 피곤을 느낀다. 바람이
지독하게 휘몰아친 어제는 현대작곡가인 구 소련의 지성인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를 Borodin String Quartet
지휘자 제임스 레바인의 지휘로 쉬카고 교향악단의 연주로 베토벤 소나타 연주를
듣던 날이었다. 그저 모든 것이 너무나도 삭막하고 황폐한 느낌이 드는 먼지돌풍이
불어오는 날의 느낌이라곤 가슴조차 그 쓸쓸함에 움츠러들었다.
그러고 난 다음날인 이 밤 익히 전부터 알고 있었던 프랑스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이신 화가 김인중 신부님의 초대전시회에 관한 귀한 기사를 조선일보에서
접하게 되었다. 미대를 졸업한 화가인 그분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수도회에
입회하시고 수도자의 길을 걷게 되셨다. 그리고 화가로서의 활동은 그 동안도
지속되어 왔었고 현재도 유럽화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시고 계신 신부님께서
이번 귀국 전시회에서 나온 작품 판매 대금 전액을 국제구호기관에 기부하였다는
귀한 소식이었다. 이런 기사를 읽을 때면 현 한국기독교계와 불교계에 대하여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기독교 목회 직도 세습을 하고자 무리를 일으키거나 질보다는 양적으로 팽창하는
데만 눈이 어둡거나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 역할보다는 떠받들림만 받고자 하는
절대 다수의 목회자들의 일그러진 모습들이나 종교재단의 재산권을 놓고 각목
피 싸움을 벌리는 불교계나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고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 전 어느 안하무인이 붓꽃 블로그를 스쳐가며 올려진 <법정스님 사색>을 보고
사탄에 사로잡히지 말고 성령은사 받고 천국에 가라며 기독교인이 되라며 어이가
없는 구린내 나는 역겹다 못해 경멸스러운 언어 배설의 똥 한 무데기를 싸질러 놓고
간 적이 있어 삭제란 삽으로 치웠다. 영어에 “Fanatic”즉 광신도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무지한 인간들이나 배운 식자나 한국 기독교의 절대 다수가 깊이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성찰할 때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법정스님 정도라면 종파를 넘어서 그는
한국 사회의 정신적인 스승이요 지성으로 바라보아야 옳은 것이 아닐까?
지성과 이성의 한계와 신앙의 한계도 구분 짖지 못하는 인간들이 하나님 아니라
부처님이나 마호멧이나 더한 것을 믿은 들 은혜가 될까 싶은 시각이다.
초대교회의 그 청빈한 삶을 왜 인간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까마귀 고기라도 먹은 것처럼 잊고 살며
세치 혀나 그 얇은 입술로 가증스럽게도 설파하고 누구를 가르치려 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더 더욱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무지함 속에서 얼굴이 안 보인다고 마구
지껄이는지 알 수가 없다.
그뿐이랴 교직에서 은퇴한 장로 직을 갖고 있다는 어느 인간은 아예
한 게시판에 장로는 이란 아이디로 만들어 들어와 선교를 하려고 하였다나
뭐래나 그러니 한 기독교의 직분을 갖고 계신 그야말로 식자인 어느 분이
준엄하게 꾸짖음에도 막무가내로 안하무인인 모습을 최근에 본 쓴 경험이
있다. 식자인 꾸짖은 분은 방사선과 전문의로 미국 동부에 거주하시는
60대에 계신 어른이셨다.
물론 기독교인 전부나 목회자와 직분을 갖고 있는 분들 전부가
그런 모습은 절대로 그리고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작금에 절대 다수가 잘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가관인 것은 이상현이란 한국 사회 저명인사인 목회자가
법정 스님의 해외여행을 통한 책 출간에 관하여 어느기독교 게시판에
비판을 가한 일이다.
그의 말로는 자신도 법정 스님을 좋아 하였고 그분의 출간된 수필집을
하나도 빼지 않고 읽는 정도의 애독자였지만 법정 스님의 문학 활동
중반서 부터 외국 여행을 통한 이야기가 나오다보니 과연 책이 팔리고
인세를 받다 보니 자주 외국으로 여행을 하는 듯한 인상을 바라보며
그분이 <무소유>를 설파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가 하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목회자인 본인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일상을
지탱하고 있고 자신 역시 외국으로 집회인도하러 가는 현실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 가 하는 질문이 자리를 하게 된다. 어불성설도 이런
어불성설이 없다 싶은 유명인사란 목회자의 한 사회지도자에 대한
흠집내기 비판이다. 제 눈에 티끝은 왜 보지를 않는 가 하는 것이다.
이게 현실이다.
많은 경우 목회자들이 은퇴 후 예기치 않은 특정 상황에 있는 경우
일반인들이 상상 하지 못하는 경우의 행동과 처사는 비일비재하다.
평소 떠받들림만 받아오던 사람들이란 그 범주를 벗어나지를 못하여
성경에서 가르치는 타인에 대한 배려보단 오히려 떠받들림을 요구하거나
안하무인인 경우가 다반사이다.
적어도 신앙을 이야기 하자면 일단은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대를
존중함은 물론 상대의 신앙조차도 존중함이 우선 배려차원에서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 까? 한국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가 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아닌 어떤 종교도 악이란 논리내지는 시각이
과연 옳은 가?
모슬렘 교도들 역시 가브리엘 천사를 찾고 구약을 인용하고 유대교도
역시 구약의 모세를 인용하고 있다면 우린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신앙의 맹종과 무지만큼 인간을 세뇌시키고 가정은 물론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서구문명을 보라 교회는 젊은 이들이 떠나
늙은 노인들로 가득한 현실이다. 요가나 각종 동양사상을 배고파하는
파란 눈들을 생각하여 본적이 있는 가?
양적인 팽창과 신도수 늘리기 보단 내실에 충실하여야 하며 초대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국기독교가 살아남고 부흥이 되리라 생각한다.
무엇 때문에 캐톨릭 신자 수가 역으로 현재 증가하고 있으며 기독교인들
또한 일부가 개종을 하는 가 하는 것은 생각하여볼 일이다. 물론
타 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함도 엄히 상존하는 현실임을 감안하여도
그렇다. 종교는 마약이라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짖지 않았던가..
한국의 대표 지성 이어령 선생님이 기독교에 귀의한다고 신문지상으로
어제인가 떠벌리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무슨 일로였다……………
혹자는 그의 딸의 불행한 결혼생활과 암 투병으로 그 종결을 짖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던 머리카락 허연 어느 유명 여성 앵커하고 재혼한
현 한국 정부에 기생하여 정치판에서 난리 부르스를 치던 허접한 인생과
가정폭력과 암투병과 자녀출산에 따른 두 번째 아이의 자폐증세로 몸과
영혼도 모두 병든 한 유명인사이자 대표적 지성의 영식인 미국법대를
졸업 후 변호사로 활동하던 이어령 선생님의 가련한 따님과 악의 씨앗인
죄없는 어린 외손주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런 주변의 불행과 아픔으로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한 지성이 어떤
연유이든 곧 세례를 온누리교회 하용주 목사란 분의 집례로 받게 되며
기독교에 귀의한다고 대서특필을 하고 있었다. 파렴치한 인간들과
삶이 판치는 세상에서 한 가난한 수도자이자 화가로서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한 영혼의 구도자인 김인중 신부님의 이야기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이 아닐 수가 없다.
진정한 종교인이 어떤 모습이며…………
진정한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진정한 신앙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것인가를
수많은 말의 배설보다는 행동과 삶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위하여 모범적으로
보여주시는 분이 프랑스 수도회의 수도자인 화가 김인중 신부님 같은 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참고로 이 글을 읽을지 모르는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구인가 되시는 귀한
분들 즉 영혼들을 위하여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자 말씀드리자면 붓꽃은
기독교와 캐톨릭이 상존하는 가정 환경 가운데 있으며 정신적인 한 분의
갓화더는 모국에서 감리교 재단의 원로 장로님이시며 또 다른 가족 구성원의
한 분은 한국이 아닌 지구촌 한국기독교계에 그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교회의
장로님이다.
붓꽃 그는 그럼 누구인가라고 의문 부호를 단다면
그도 성경을 읽는 사람이다.
그러나 타인의 종교와 신앙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이해인 수녀님이나 법정 스님은 서로 교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린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할까?
붓꽃 블로그는 <문학과 예술>이란 쟝르 이외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
다만 김인중이란 한 수도자 화가의 이야기를 토론하다 보니 이곳까지
와야 하였다. 그분의 신앙인으로서 모든 지구촌의 영혼들에게 충분히
귀감이 되는 사연이기에 더욱이 그렇다.
인간은 인간다울 때 비로소 인간이다.
신앙 역시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때만이 그 존재의 의미를
갖고 있다. 김인중 신부님 화가의 화폭 위에 색감의 배합을 보고
있노라면 살며시 포근하게 깊고 고요하게 감동으로 다가온다. 초현실적인
추상화가 무엇을 상징하는 가라고 구태여 묻거나 알지 않아도 충분히
그 색감의 감동은 느낄 수 있다. 칸딘스키가 김인중 신부님 화가의
작품을 보았다면 무엇이라고 평을 하였을 까? 감탄을 하지 않았을 까
그 순수함에 그 색감이 주는 따듯함과 평안함과 포근함과 아름다움에…
직접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자이신 신부님의 작품을 만날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도 않타까울뿐이다 예술은 인간을 위한 영원한 위로이며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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