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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꽃 독백

붓꽃 독백 – 세월의 질주 <재평가 되어야 할 화가들>

붓꽃 에스프리 2007. 5. 12. 06:07

 

박수근 - 풍경 Oil on canvas, 1957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세월의 꽃잎이 바람에 흩날려 뒤를 돌아볼 틈 조차도

없다. 그저 하룻밤 자고 나면 세월의 꽃잎은 저만치 날아가 인생이란 보도

위에 그 얼굴을 떨치고 뒹굴고 있다. 샤워를 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빗질할 겸

거울을 바라보노라면 왼 낯선 얼굴이 서있다. 아마도 나이가 좀더 드신 분들

말씀에 거울을 바라보기가 싫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인가 싶다.

 

영웅호걸과 황우장사인들 어찌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잡을 까 싶다.

벌써 5월도 저만치 흘러가 있다. 이상기온인지 폭염이 한판 휩쓸고 지나간

자리 위에는 건조한 산과 들에 시민들의 부주의 내지는 의도적인 방화로

상당한 피해를 입히고 이제서야 기온은 평년기온을 유지하고 있다.

 

요즘 IT 산업의 발달과 인터넷 서비스의 향상으로 우리 생활의 패턴에 중세

시대 종교개혁 이상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다양한 온라인 서비스요 또한 역으로 범죄활동도 그와 상응하게 지능화 하고

있어 우리네 선량한 시민들의 마음을 멍들게 한다.

 

획기적인 변화 중에 하나는 예술작품인 그림을 거래하는 방식의 변화이다.

과거라면 전시회장이나 갤러리에 가서나 흥정이 이루어지고 소장이 가능한

일이 요즘은 온라인 서비스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방식으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즉 구매자 신분의 프라이버시도 보장되고 동시에 구매자는 투자가

목적이든 아니면 예술품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든 화상과 구매자인 소비자

사이에 판매와 구매 방식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폴 세잔의 수채화 정물 초록빛 수박이 있는 그림이 세계적인 소더비 경매장에서

한화 236억 원에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화가 박수근의 작품 또한 한국 화단에

그 기록을 갱신하고 십 단위의 억 원에 경매되는 진기록을 세우고 있다.

 

세잔은 미대에 입학조차도 거부당한 아픔을 딛고 몇 번이나 그림을 포기하려던

절망을 딛고 덕망 있는 부인의 조언과 배려로 화가로서 성공의 길을 가게 되었다면

화가 박수근 그는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 가난으로 천부적인 그림에 대한

재질에도 불구하고 소학교가 교육과정의 전부였으며 독학으로 오늘날 한국의

근대화단에 독보적인 그만의 빛나는 작품들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한국 근대화단을 논할 때면 의례히 문학에 있어서 이상만큼

이중섭을 천재화가라며 추켜세운다. 그러나 추상화의 선구자 유영국 화백은

그의 월간미술과의 오래 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중섭 씨의 작품은 어떻습니까?

사실 이중섭은 작품다운 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6.25 나고 피난 후라 안정이 안 돼서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지요. 이중섭은 나중에 문인들이 키운 사람입니다.”

 

이중섭은 일본 동경의 문화학원 미술대의 유영국 화백의 후배로 유영국 화백이

3학년 때 1학년이던 학생이었고 이중섭도 천경자도 모두 문인들 내지는 언론이

키워낸 화가란 평이 일단의 순수미술을 지향하는 분들의 식견으로 평가되는

시각이다. 화가 천경자씨의 경우 배우자가 언론인 이었고 배우자의 후원이

컷던 화가로서 알만한 지식인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천경자씨의 사위는 현재

미국 미대에 재직하고 있는 M 교수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때 진정으로 독보적인 화법과 기법으로 한국 근대 미술을

전문교육 없이 가난을 딛고 일어선 화가 박수근을 한국 근대화단의 선구자요

그 흔해빠지게 언론에서 남용되는 천재화가란 칭호를 부쳐주어도 무방하지

않을 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박수근의 작품을 관심 깊게 바라본다면 그의 작품 안에서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점묘법내지는 특히 나무를 주로 많이

그린 그의 그림들 안에 담겨진 반 고호가 많이 사용한 스타카토 유형의 붓질과

같은 그만의 뛰어난 기법은 한국 근대화단에 무성한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는

현저하게 비교되는 독보적이고 개성 있는 작품들이 아닐 수가 없다.

 

국력이 강한 나라였다면 화가 박수근의 작품은 세계 화단에서 그만의 독보적인

기법과 작품성에 있어서 인정받아야 마땅한 걸출한 화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위에 걸어 놓은 박수근의 그림 <풍경>을 바라보아도 그의 그림이

반 고흐나 세잔의 그림보다 표현기법이나 표현력에 있어서 못하다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때론 국력과 언론과 수많은 조건들과 운이 따라주어야

또한 세계 화단에서 인정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한다.

 

인상파 화가 중에 한 사람인 르노와르의 사진을 주의 깊게 바라본 사람이라면

그의 손들이 뭉그러져 있씀을 인지하였을 것이다. 자전거를 타다가 다쳐서

팔에 골절상을 입은 화가 르노와르는 얼마 되지 않아서 퇴행성 관절염으로

화가의 생명인 손이 뭉그러지는 불구가 되는 불운을 맞는다. 그러면서도

윌체어에 앉아서 뭉그러진 손으로 생의 마지막까지 불멸의 작품들을 남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화가 르노와르가 되었다.

 

화가 박수근 역시 찟어지는 가난과 싸우며 호구지책으로 미군부대 전속화가로

극장 간판을 그리면서 한국 근대화의 대표적인 달동네 동대문 밖 창신동

산동네 판자집에서 살아가며 동생들을 돌보아가며 살아야 하였다. 그는 말년에

그 당시 의술 부족으로 백내장 수술을 하고 후유증으로 온 안압을 치료할

방법이 없어서 치료 방법의 하나로 시신경을 끊고 한쪽 시력을 잃고 만다.

 

그리고 한쪽 시력으로 그는 오늘날 몇 십억을 호가하는 명작들을 남긴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의술이었다면 약물치료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는

시대의 가난 속에 시력마저 잃고 살아야만 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그 당시

미군들이 사가곤 하였었고 그런 그림들은 수집상을 통하여서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 수십억을 호가하여 경매되는 진기록을 사후에 남기고 있다.

 

반 고흐나 이중섭이나 박수근이나 가난과 싸워야 하였던 불운의 화가들이다.

그들만의 불멸의 작품은 이런 가난 속에서 잉태된 산물로서 가진 자들의

손안에서 다시 태어나 오늘날 범인은 범접도 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가격대의 투자대상으로 팔려나가고 있다. 한편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반 고흐도 박수근도 이중섭도 제대로 한번 두 다리 뻗고 배 두들겨 가며

평안하게 산적이 없는 찟어지는 가난과 싸워야 하였던 사실을 고려할 때

그들의 작품을 헐값에 손아귀에 넣고 세월이 그들의 작품을 천문학적인

투자 대상의 목적으로 이끌어낸 사실에 불평등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도 피카소 같은 20세기의 총아만이 물질의 풍요와 명성에 걸 맞는

대우를 받고 수많은 명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지 않았나 싶다. 화가 박수근은

화가 이중섭 이전에 재평가 받아야 마땅한 한국 화단의 대표적이며 독보적인

화가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만의 기법과 표현력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