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고 나
순수한 영혼의 사색과 사랑 그 영원한 삶의 에스프리

붓꽃 독백

붓꽃 독백 - 전화벨이 울릴 때

붓꽃 에스프리 2011. 10. 16. 05:50

 

 

 

 

몇일전 아침결에 전화벨이 울렸다.

우리 미국 연방정부법에 소비자는 각종 상업광고나 불필요한 전화로 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정부의 특수부서에 전화번호를 등록하면 등록된 전화번호는 어떤 목적으로도 전화를 걸지 못하게

법으로 보호 받는다. 그럼에도 어쩌다 한번 정도는 실수로 오는 경우가 있기에 잠자리에서 받고

헬로우를 하여도 저쪽에서 답이 없다. 끊으려는 순간에 한국어 목소리가 한번 들리는 것이었다.

순간 무엇인가 뇌리를 스치는 것이 아....우리 아버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후 전화벨이 다시 울려 받으니 아니나 다를까

첫 마디가 "나다. 아버지다. 잘있었니?"

"아버지, 그런데 제가 급히 나가야 해요. 한시간 반 후에 전화를 드릴게요."

"알았다. 전화다오..."

 

볼일을 보고 돌아오니 시간이 저만치 흘러 갔다.

아니야 아예 저녁시간에 드리자 하고는 저녁이 되어서 전화를 서울로 드리니 아버지가

받으신다. 아버지 음성에 힘이 없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가슴이 싸하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그래 아빠는 잘있다 너는 어떻게 지내니?

무리하면 허리가 조금 아픈 것 이외는 혈압약도 잘 복용하고 있고 조절 잘되고 있어 정상이다."

아버지가 50대 초반이셨을 때가 언제 세월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이제 우리 아버지도

늙어가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시린 순간이었다.

 

타인과 타인으로 시작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다.

아버지는 유년시절의 담임 선생님 이셨고 나는 선생님의 제자였었다.

 

아버지로 부터 나는 세명의 남동생을 갖고 있다. 큰 동생은 아버지와 같은 대학교 같은 과

동문인 기이한 인연을 갖고 있다. 이제 그도 40줄을 넘어 큰딸이 곧 대학을 들어가는 연령이

되어 해외에 근무를 하고 있고 둘째 동생은 그렇게 활동적이고 살랑거리더니 어느날 난데

없이 호주 시드니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박봉의 아버지를 힘겹게 하고 지금은 대학원을 맞추고

같은 유학생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재작년에 어느 교회에 장로가 되어 부부가 전문직에

종사하고 두 자녀를 두고 살고 있고 막내는 아버지 곁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한국을 떠난 후 거의 20년 세월이 될 때쯤 아버지는 어머니를 암으로 잃으셨다.

그 당시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너를 보고 죽고 싶으시다며 한국을 나오라 하셨지만 너무나도

가난한 고학생인 나는 비행기표 살 여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결국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 드릴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무너지고 피눈물이 나는 아픔이다.

 

그 다음해 학업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가을날 아버지 곁으로 날아갔다.

홀로 사시는 아버지와 세 동생들과 박봉의 교사월급으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생들 둘은 아직도 대학을 다니고 둘째 동생과 막내 동생의 대학 입학금은 가난한 학생이던

내가 모두 보내주었지만 어머니 안계신 생활의 리듬은 언제나 우리를 힘들게 하였다.

 

밤이면 연탄불 갈아가며 추운 겨울날 큰 다라에 세탁물 넣고 가루비누 풀고 맨발로 들어가

짖밟고 빨아가며 널어 말리고 하여 가면서 아버지와 어린동생들과 살아가야 하였던 그런

시절을 함께 지나오면서 스승과 제자는 이미 아버지와 아들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모국을 떠나온지도 머지않아 거의 반세기가 되어간다.

 

그후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타의반 자의반으로 아주 선하시고 영혼이 아름다운 새어머니를

맞아 재혼을 하신 후 이 아들에게 다녀 가셨고 나는 그리운 아버지와 어머니를 뵈오러 6년전

가을날 한국을 다녀왔다. 아버지가 재혼하신 세월도 어언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이도

늙으신 우리 아버지 젊으실 때 부터 그러셨지만 이제는 백발이시다 못해 은발이다.

 

아버지의 존재로 이 세상 어느 곳에 가서 살았던 그리고 공부를 하였던 나는 나를 흩으러

트리거나 절망하고 쓰러질 수가 없었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늘 내 영혼 곁에서 준엄하신

모습으로 나를 지켜보고 계셨었고 내손을 잡아 주시면서 올바른 인생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가르치셨고 늘 깊은 신앙으로 이 아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셧던 분이시다. 물론 이 아들에게

아버지 같은 굳건한 신앙은 없지만 그럼에도 포기를 하시지 않으셨고 더욱이 강요를

하신적도 없으시다.

 

누구나에게나 아버지의 이름은 있다.

아버지 이름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없기 때문이다.

낳아주신 생물학적인 아버지 그리고 길러주신 아버지 또는 스승과 제자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길러주신 아버지 그 이름은 다양하다.

 

아버지만큼 큰 이름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다.

삶의 등대와 언덕바지 같고 큰 우산같은 존재로 인생의 애련하고 사무치는 그리움의 항구

그것이 바로 아버지란 이름이란 생각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을이 깊어 간다.

그립다 아버지와 파파와 내 형아가 사무치게 이 가을에....

그리고 내 모든 사랑하는 인연들이.....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있는 오늘 같은 가을날에...

 

 

 

 

IV. Adagietto, Mahler Symphony No. 5
Performed by Sarah Nemtaru and Orchestre National de France
Conducted by Bernard Hait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