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저께는 퇴근 후 샤워를 하고 나오니 집에서만 사용하는 지난해 가을에 맞춘 지금까지 매년 한 번씩
보험에서 해주는 안경 중에 가장 편하게 느끼는 구치 안경테의 안경이 눈에 보이질 않았다. 평소 출근 전
안경집에 넣고 가는 데 안경집에 없는 것이었다. 침실을 다 찾아보고 늘 안경을 두는 침대 주변을 다
조사해도 눈에 안 보이는 것이었다. 당혹스러웠다. 하는 수없이 재작년에 맞춘 덴마크산 린드버그
안경테로 만든 안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밤 8시가 되어서야 한 달에 한 번 오는 아이가 다세대 주택에 월세를 받으러 왔다. 이야기를 하니
아이가 여기저기 찾아보더니 바로 내가 앉는 데스크 탑 책상 의자 바로 옆 바닥에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순간 구세주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잘못하면 안경을 부수어 버릴 뻔했다면 아이가 한마디 하였다. 사물이
밝고 선명하게 보여서 새 세상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국민연금에서 제안한 목돈 2천만 원이 넘는 일시불 지불을 왜 거절하고 매달 받는 연금을 가장 높은 수가로
신청했냐며 투덜대기에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어찌 아냐고 했다. 내가 앞으로 10년을 더 살지 20년을 더 살지
아니면 그 사이에 죽을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했다. 그러기에 노년에 충분한 생활비가 없으면 얼마나
궁색하고 힘들겠냐고 하며 목돈 말이 좋지 그 돈 잘못 관리해 없어지면 매달 최고치로 고정적으로 남은 인생
연금 수령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나는 외식을 즐겨 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나는 요즘 햄버거 값이 얼마 하는 지도 솔직하게 모른다. 아빠 헨리
살아계셔서 가끔 우리 부자가 사 먹던 햄버거 그 당시는 6불이면 충분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10불 간다고 한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유럽이나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으로 요즘 살기가 힘들다.
뉴스를 보니 한국 대학생들이 아침 점심 한 끼 사 먹는 것도 부담이 되어 굶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뉴스가
유튜브에 올라온 것을 보았다. 하여 정부에서 또는 부산 외국어 대학교의 경우 학교 측에서 아침을 무료 급식을
한다고 올라왔다. 아이 말로는 한국이 일본 보다 7배나 높은 개인 빛을 갖고 있다고 하며 외국여행 다니고 하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빛 더미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며 열변을 토했다.
일본은 월급이 낮아도 옌화 가치가 낮아 지난해 일본을 다녀온 아이 말이 그만큼 물가도 싸서 사는데 그다지
힘들지 않다고 하며 현금을 사용하는 일본이 아직은 한국 보다 개인들이 덜 빚을 지고 있던지 아니면 빚을 지고
있지 않다고 한참을 셀폰으로 정보를 찾아내어 나와 잠시 옥식 각신을 하였었다. 잘못하면 한국 경제가 다시
IMF가 올지도 모른다며 빛 좋은 개살구 한국의 현실이라고 요즘 왜 젊은이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의료계
전문직을 전공하고 직장을 잡고 자리를 잡고 싶어 하느냐며 아이가 항변을 하였다.
보릿고개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 하고도 특별히 미국에서 출생한 아이들이 어찌 우리들의 지난한 지난날
우리가 겪었던 전후의 가난한 한국과 문화도 다르고 산도 물도 설은 다른 나라에 타의든 자의든 와서 갖은
고생과 역경을 이기고 각고 끝에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온 것을 이해하랴 싶다.
이 아침 은행구좌를 열어보니 드디어 은퇴연금이 생일 달 2월과 3월을 계산해 은행구좌에 입금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제는 정말 연금 수령자가 되었구나 하는 느낌과 동시에 내가 정말 늙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아이는 왜 은퇴를 당장 하지 않고 내년까지 기다리냐고 한마디를 또 했다. 그거야 내년 1월 첫 주에 2년마다
올라가는 진급을 하고 나서 은퇴하게 되면 은퇴 연금 수령액이 달라지기에 남은 1년 진급 시간을 두고 은퇴하기에는
아까워 올해 한 해 더 하고 내년 여름 끝자락 정도에 은퇴하고 내가 계획한 일들을 위해 조금 더 저축을 하려고
연장근무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만약을 위해서 유언장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제 친구 러시아계 유대인 백인 친구 변호사에게
물어보겠다고 하여 알았다고 했다. 물론 내가 갖고 있는 여러 개의 구좌에는 만약의 경우를 위해 아이를 수혜자로
서류에 올려놓았다.
제발 먹고 싶은 것 사 먹고 때론 외식을 하는 것이 요즘같이 물가 비싼 때 오히려 더 경제적일 수 있다며 지네는
부부가 일주일에 한 번은 외식을 한다고 하며 주절거려 나는 별로 외식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고 했다. 배추가
나빠 김치 중간 사이즈 하나 산 것도 내가 늘 담가 먹던 맛과 달라 맛도 없어 별로라고 했다. 며칠 전에는
알래스카에서 잡아 갖고 진공포장해서 갖고 온 대구를 직장 동료가 준 것을 데리야키 소스를 넣고 올리브기름과
다른 재료와 함께 요리한 것을 맛나게 세 끼를 식사할 수 있었다.
갖고 있을 것을 다 갖고 사는 아이들이 어찌 우리 세대를 이해하랴 싶었다. 다들 은퇴하고 온종일 독수공방에
그 고독과 외로움 허무를 못 이겨 우울증에 빠졌다는 소식부터 2년 내내 전 세계 여행을 하니 그것도 지치고
지겨워 지금은 부동산 중계 업을 한다는 사람부터 각양각색이었다. 하나같이 공통점은 아들딸들이 낳은 손주들
베이비시터 해준다는 이야기부터 다들 자식이란 애물단지란 생각을 했다.
늙어 돈 없고 살 곳 없이 홈리스로 사는 백인들 흑인들 널렸다. 내 나이보다도 훨씬 작은 육십 대 초반이나
중반에 중병 들고 머리는 반백이 되어 70 중반이나 그 이상으로 보이는 사람부터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건강하고 젊을 때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고 지혜롭게 돈을 사용하고 먼 장래를 내다보며
일거수 일투족을 살지 않으면 인생 말년이 비참하다는 것이다. 젊어서 온갖 못할 짓 다 하고 케쎄라 께세라로
살고 여기 미국 사람들이 늘 부르짖는 방종의 자유의 끝은 홈리스되는 것이고 중병 들어 더 살아도 될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하여 나는 평생을 고학하며 진 정부 학비 융자금 빛 상환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지금은 단 일전도 빚을
지고 있지 않으며 평생에 남에게 단 한 번도 돈 빌린 적 없고 손 벌려 본 적 없다. 철저하게 홀로서기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리고 철저하게 장기이자 저축을 하였으며 나를 위해서 사치스러운 명품이나 다른 것에
돈을 사용한 일은 없다. 기껏해야 훼라가모, 린드버그나, 구치 안경테 사용한 것이 전부다.
남의 집 세 사는 인간들이 벤츠나 BMW 몰고 다니는 경우는 수도 없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남들에게
있는 척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그런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돈이 없어 좋은 차를 못 사랴 그건 아니다.
사람은 제 분수를 모르면 고꾸라지게 되어 있는 것이 삶의 진실이다. 내 분수를 지키며 살고자 하는 것이
처음도 마지막도 나의 바람이며 신조다. 비굴한 인생을 절대로 그리고 결코 살고 싶지 않으며 당당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고 싶다.
그러기 위에 남들 놀러 다닐 때 밤잠 설치며 26시간을 연구 보고서 작성하고 학업을 맞춘 것이기도 하다.
직장 다니며 장거리 야간에 운전하고 상급학교 다녔고 그런 시간이 있기에 지금은 남들 보다 몇 배 높은
보수를 받고 평생고용이 보장된 직장을 지금도 근무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절대로 콩 한 톨도 공짜는
없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이 아침 전직 대통령 전두환 손자 27세 전우원의 기사를 읽노라니 절로
눈물이 났다. 그 당시 나는 한국을 방문 중이었다.
그동안 독재자 전두환의 손자란 오명을 달고 다니면서 그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마약에 손을 댔을까 하는
마음이다. 그런 그가 광주항쟁 희생자들 유족들 앞에 진정 어린 사죄를 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로 생각한다. 은퇴가 결코 기뻐할 일만은 아니라고 며칠 전 친구 제넷이 카톡을 보내온 내용을
몇 번을 곱씹어 본다.
이제 부엌에 들어가 상추와 콩나물 세척하고 요리를 할 시간이다. 이 아침은 속이 조금 불편해 굶었다.
왜 남들처럼 모래를 씹어도 소화를 잘 시키는 체질을 갖고 태어나지 못했는지 원망스럽다. 먹고 싶은
음식도 항상 절제하며 살아야 하는 이 고통 벌써 4월 하고도 한국은 사흔날이고 여기는 이튿날이다.
세월도 참 빠르다. 이 아침 오랜만에 후이 암스트롱의 재즈 음악을 듣는 싶다. 여유를 갖고 싶다.
부엌에서 보낸 시간이 두 시간이 되었다. 콩나물 세척해 스팀으로 쪄서 처음으로 들기름, 마늘 가루소금
약간 뿌리고 맛을 보니 담백했다. 거기에 문득 매콤함을 느끼고 싶어 고운 고춧가루 한 티스푼 넣고 무쳐
그릇에 담고 다음은 양배추와 버섯과 양파와 함께 후춧가루와 굴 소스 넣고 올리브 기름에 살짝 볶아
그릇에 담아 이 또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시켰다.
다음은 돼지갈비 물에 담가 두었다가 세척해 물 빼고 마늘하고 고추장과 고춧가루와 미린 섞어 양념을
만들어 버무려 하루 숙성 시키려고 파이렉스 그릇에 담아 비닐 덮어 냉장고에 집어넣고 냉장고 정리하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다. 잠시 쉬며 루이 암스트롱부터 시작되는 재즈를 듣고 장수 막걸리 한잔 마시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내가 몸이 건강해 이 나이에 20 대 30대 40대들과 함께 근무할 수 있고 아직은
검은 머리를 갖고 있는 것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돈이 억만금이 있고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와 권력과 명예를 갖고 산다 한들 건강을 잃으면 세상을
다 잃는 것이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자기 몸은 자기가 관리하지 않으면 그리고 건강한 식단과
건강한 일상을 추구하며 살지 않으면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수없는 성인병과 중병에 걸려
온갖 고통 당하다 생을 비참하게 맞는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특히 백인들과 흑인들 그리고
스페인어권 인구가 그렇다.
기억력도 이제는 젊을 때와 달리 쇠퇴해 뭔가 제자리에 두지 않으면 어저께 안경 찾듯이 헤매고
육체적인 힘든 일은 더 이상 할 수도 없고 하여 아이가 내년까지 연장근무하는 것을 그러다 몸이라도
다치면 어쩌냐고 극구 반대를 하고 난리다. 문득 지난 젊은 날의 캐나다가 그립다. 우리 아버지
후레드 살아 계셔서 함께 여행하며 즐겁고 행복한 추억이 가득한 동토의 땅은 지금도 눈 쌓인 겨울이고
5월이나 되어야 봄이 된다. 은퇴하면 아버지 후레드와의 추억을 찾아 캐나다를 방문하고 싶다.
못내 못다한 그리움에 눈물이 날것만 같다.
Its not a year ago when i first find this song, after few months my father got jaundice and cause was
identified as advanced stage gallbladder cancer. That was may 2022, doctors gave few months for
his survival, as allopathy \was given up hope, we decided to keep this hidden from him and dint
start any chemotherapy, only not to make his life more painful. Its been now 4 months and his health f
urther deteriorate and cancer more progressed. I know sometime i will listen this song again and remember
that this message is written by my when he was alive. We started alternate treatment but nothing seems
to work well. Now i only know that my parents are my 2 gods connected together, and one of them is dying.
My only hero is going. Please pray for him... i love u papa (pitaji)
이 노래를 처음 찾은 것은 1년 전이 아니라 몇 달 후 아버지가 황달에 걸렸고 원인은 진행성 담낭암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것이 2022 년 5月, 의사들은 그의 생존을 위해 몇 달을 주었고, 동종 요법이 희망을
포기하면서, 우리는 이것을 그에게 숨기고 화학 요법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 4개월이 되었고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암은 더욱 진행되었습니다. 나는 언젠가 내가 이 노래를 다시 들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 메시지가 그가 살아 있을 때 쓴 것임을 기억합니다. 대체 치료를 시작했지만 아무 효과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나는 부모님이 함께 연결된 두 신이고 그 중 하나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유일한 영웅이 간다. 그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아빠 사랑해요 (피타지)
이 노래에 달린 인도계 사람의 위의 댓글에 나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못다한 아빠 헨리와
오늘의 나를 존재 가능케 해주신 아버지 후레드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에 이 대낯에 칠십의 이 늙은
사람 흐느껴 울고 말았다.
이달말 올해 2차 휴가 2주간 시작되면 아빠 헨리 재를 뿌린 곳을 찾아가고 싶다. 물론 늘 함께 갔던
그 여정에 이제 아빠 없이 나 홀로 가야 하지만 그래도 가리라 생각한다. 아빠 헨리와 함께 했었던
그 모든 지난 날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이제 내가 유언장을 남겨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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