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고 나
순수한 영혼의 사색과 사랑 그 영원한 삶의 에스프리

붓꽃 독백

Tuesdays with Morrie를 만나기까지 No. 1

붓꽃 에스프리 2006. 11. 24. 19:25
 

 

 

지난해 모국을 방문한 시기도 역시 9월 마지막 주에서
10월의 세 번째 주까지이었다. 올해 가을 여정 역시
10월의 마지막 주였다. 일리노이부터 버어지니아까지
그리고 캘리포어니어까지.....

 

나는 늘 생각한다.
나는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서 살아야하며
지금 과연 올바르게 살고 있고
존재의 의미를 갖고 살고 있으며
과연 얼마나 내게 남은 생명과 그 세월이 허락되고 있으며....

 

나는 과연 죽음 그 이후 때로는 생각만 하여도
어두움으로 가슴 터질 것 같은 단 몇 치 관속의 어둠 속에서
어떻게 그 어둠을 이기고 무한한 또 다른 우주의
원리를 따라서 存在와 無 存在 앞에서 큰 고통 없이
지극히 높은 분이 부르는 날 평안하게 모리 교수님처럼
눈을 감고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과의 別離....

 

그 냉철한 이성의 갈림길에서 죽음 이후
아무도 모르는 그 상상 속에 더 큰 만남을 위하여서
살아가며 현실이란 냉혹함 앞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 갈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 싶다.

 

나는 내자신이 살아오는 동안에 항상 끝없는 배고픔이
있었다면 그것은 인간의 실존과 지성에 대한 갈급 함이었다.
무엇인가 늘 가슴속에 허전한 마음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지나온 날들에 대한 수상록을 쓴다면 누구나 그렇듯이
몇 날 몇 일을 새우고도 모자라는 자신의 인생역정에
대한 기록이다.

 

잠시 미국의 전통적인 영국계 건국의 아버지들의
자손들 집을 방문하는 경우 일단 그 집에 오는
손님이 묵는 방과 화장실은 절대로 집주인들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은 사용하지 않는다.
사용하는 경우에는 미리 이야기를 한다. 내가
당신의 화장실을 사용하겠노라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을 한다. 또한 아무리 가까운 친구인 손님이
묵는 방일지라도 어떤 일이 있어도 열어보지 않는다.

 

또한 시시콜콜 상대에 대한 사생활이나 기타 사항에
대하여 혹은 타인에 대한 호기심과 의구심으로
주관적인 시각이나 의도로 대화 중에 가십거리로
회자시키는 무례한 일은 결코 없다.

 

그들은 최소한 개개인의 의견과 생활철학과 시각을
존중할 줄 알며 고마움은 고마운 줄 앓고
순수함은 순수함으로 바라볼 줄 아는 단순함도 있다.
적어도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 이상의 계층에서 사는
건국초기 청교도들의 자손들이라면 그렇다.
그들에게는 엄한 윤리와 도덕의 잣대 또한 있다.

 

그러나 호기심을 넘어 기본 상식을 넘어서는
지나침으로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요구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語不成說을 定說처럼 여기고 타인에 대한
말 말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많은 경우
현실 사회 안과 통신 속의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수치스러운 악습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특히 사이버에서 그 누구도 자신의 삶,
그 과거, 현재와 미래를 적나라하게 백일하에
이렇다 하게 공적인 곳에 밝힐 어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아무런 의무도 없다....

 

그야말로 네가 날 모르는데
내가 널 알 리가 있느냐이다....
그리고 세치 혀 조심......
말초신경 조심.....
행동조심........
그 중에서 하나만 고르라면 세치 혀 조심이리라..

 

우리는 오늘도 필봉과 가십으로 우리들의 선한
이웃의 영혼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그냥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말 말로서
간접적인 살인행위를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측면에서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Tuesdays with Morrie"는 우리에게 우리들
자신을 깊은 자아성찰로 이끌어 내는 감동적인
실화요 가장 인간적인 글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Tuesdays with Morrie"가 단순히 하나의 글로서만
독서의 시간을 추가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읽고 버리거나 방치하는 이야기 거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마도 이 책은 동서고금의 수 없는 명저와 고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못하는 또 다른 가장 진실한
인간관계의 기본이 되는 인간적인 사랑과 그 실천과
깊은 인생에 대한 성찰을 지구촌 수백만 독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들은 죽음이 자기 혈육이나 친지 또는
자신의 눈앞에 놓이기 전에는 타인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라고 망각 속에서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일반적인 예이다.
그러나 현실과 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언제라도 우리에게 다가 올 수 있는 예측불허가
있다면 운명이란 이름 속에 담긴 죽음이다.

 

물론 "Tuesdays with Morrie"는 오래 전에 출간된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베스트 셀러로서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모았던 서적이기도 하였다.
다만 그 책이 최근 가을 여정 속에서 나의 손에
들어와 읽혀졌을 뿐이다.

 

그러나 coach라 불리는 Morrie 교수와
player라 불리는 제자 Mitch 사이에 오고가는
헌신적이고 인간적인 마음의 교류와 이성적이고
주관적인 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나아가서 하나의 객관성을 띄우게 되는
사실이다.

 

모리 교수는 말한다.
"사랑을 나눠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그러나 이 시대는 어떤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청교도적이고 빅토리아왕조
시대가 보여주는 기본적인 인간 상식의
근간이 되는 윤리와 도덕이 상실된 시대에서
피폐한 인간성과 숭고한 인간 사회의 원동력과
힘이 되는 사랑 그 자체도 물질의 가치로 판단하고
인간과 인간사이에 오고가는 가장 기본적인
따듯한 정서 즉 정과 순수한 인간적인 사랑조차도
대다수의 경우 성(sex)과 결부시키거나 동격으로
색안경 쓰고 바라보는 불행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각과 순수를
순수로 진실을 진실로 바라보는 단순함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또 다른 영혼의 순결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원어로 읽을 때와 번역 서를 읽을
때의 뉘앙스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Tuesdays with Morrie"도 예외가 아니다.
먼저 읽은 것이 영어판이라면 지금 읽고 있는 것은
한국어 번역판이다. 일단은 번역하는 사람의 시각이
알게 모르게 조금은 담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Tuesdays with Morrie"는 우리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아주 잔잔한 감동과 강렬한
사실적인 묘사로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조된 부분은 인간과 인간사이에 주고받는
사랑의 진실에 대한 방법론과 표현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