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 내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삶에 대한 진실과 그 유종의 미를 위하여서 어떻게 막을
내려야 하는 가는 물론 그 여정의 끝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그토록 적나라하게 강렬한 메시지와
감동으로 인식 시켜준 글은 일찍 없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오래 전 근무하던 곳에서 만난 한 가정과의 소중한 인연은
늘 꾸준하게 주고받는 안부와 소식만으로 지나기에는 많은
세월이 흘러 방문을 하여 달라는 오랜 부탁을 하는 막 다른
골목 끝에 서게 되었다.
그 이전에 캐나다를 가야하는 일이 직장 동료의 문제로
와해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오랫동안의 숙제를 결행하기로
하고 목적지 남서부 버어지니아를 가는 여정을 잡고
휴가서를 직장에 제출하였다. 그때쯤에 가끔 소식을 주고받았던
쉬카고에 거주하시는 M 형님으로부터 가는 길에 들려
가라는 간곡한 부탁이 들어왔다. 가끔 문학과 예술에
대하여서 대화를 나누던 시작은 어느 날 4월이 지난 후였다.
떠나던 10월의 마지막 월요일 아침은 아침 공기가 차다
못하여서 추워서 검은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친구의 도움으로
공항에 도착하여야 하였다. 시대의 조류에 따라서 비행기 표도
이제는 온라인으로 구입하고 공항에서 스스로 전자동화로
스스로 처리하고 엄격한 보안 검색을 거쳐가야 하는 과정을
거친 후 출구에서 1시간을 넘겨 기다려야 하였다.
비행기에 탑승하여 장시간을 날아가는 것은 고문이 아닐 수가
없었다. 철없던 시절에는 비행기 한 번 타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이제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비행하는 동안 늘 해외로
출장을 다니시는 K 형님의 고충이 불현듯이 떠올랐다.
얼마를 날았을 까 시야에 도시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스튜어디스가 기내방송을 통하여서 쉬카고 오헤어 공항에
착륙을 하겠노라고 안전벨트 착용을 지시한다.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정경들은 우리 고향 서부에서는 볼 수가 없는
것들로 단풍이 여기저기 보이고 울긋불긋 수채화처럼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 자신은 모국에서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면 이번은 국내에서란 점이 다를
뿐이었다.
문제는 과연 내가 일생에 처음 만나는 분을 일 전에 빵집
아우님이 올리셨던 사진을 근거로 과연 알아 볼 수 있을 까
하는 일이었다. 우리 동네 공항과는 그 모습에 있어서 엄청
다른 곳임을 비행기에서 내려 수화물 찾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공항 천장에 장식된 네온들을 바라보면서 알 수가 있었다.
도대체 공항 같은 느낌이 아닌 어느 바에 들어가는 것 같은
전위 예술적인 감각으로 뭉쳐진 공항의 모습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수화물을 찾는 곳에 도착하니 도무지 기다려도 수화물은
나오지도 않아 사람들이 너도나도 다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분을 어떻게 만나는 가 하는 것이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동양사람은 단 한 명도 시야에 들어
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얼마를 지났을 까 저 만치서 한 동양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진에서 본 그 모습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혹시나 하여 멈칫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다가가니 순간 그분도
무엇인가 낌새를 차린 듯 하였다. 순간 뇌리에 스쳐 가는
일말의 영상이 있었다면 사진에서 느꼈던 어떤 뉘앙스가
그 얼굴에 약간은 묻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순간 서로를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사진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얼마나 놀랬는지를 모른다.
사진 속의 모습이 옆집에 사는 아저씨 같은 모습이라면
실제로 보는 그 모습은 7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어 나가던
기수의 모습 같았고 온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보는 사람을 압도하고도 남는 그런 어떤 형언하기 힘든
강렬함과 멋드러짐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 있었다.
반가운 모습으로 M 형님과 함께 수화물 찾는 곳으로 다시
다가가 겨우 짐을 찾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숨박꼭질 끝에
주차장으로 나와 10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의 눈부신
햇살을 맞으면서 짧으나마 한 시절 살았던 남부 쉬카고
Cicero 반대 편 도시 북부의 외곽을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도시면 어는 곳이든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는 현대사회에서
쉬카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교통체증을 피하여 지방도로로
가면서 여행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하시기에 우리는 그냥 첫 커피를 마시기로 하고 중간에
맥다널드를 들어가 커피와 애플 파이를 시켜서는 다시 달려
낙엽이 발목을 잡을 만큼 떨어진 미쉬건 호숫가 어느 공원에
차를 일단 정차시키고 긴 심 호홉을 하고 사진 두어 장
찍고는 바하이 성전으로 낙엽이 지고 그 옆 철교 밑으로는
겨울이면 얼어붙어서 스케이트를 타고 여름이면 조정을
한다는 작은 강이 흐르는 곳과 노스웨스턴 대학교 교정
호숫가와 다른 산책로를 돌면서 일단의 자신들이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노스웨스턴 교정 한 구석에 낮은 언덕 같은 곳이 있었다.
꼭 그 언덕 넘어에는 파랑새 한 마리가 살고 있을 것 같았다.
같이 걸어서 올라가 보니 저만치 아련한 거리 백사장에서
이제 꽃다운 청춘의 연인들이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정경이 보일 듯 말 듯한 먼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호수는 호수가 아니라 대양 바다 그 자체였다. 남북한
한반도가 들어가고도 남는 다니 말을 하여서 무엇하랴......
운전을 하고 하나의 카드를 사기 위하여서 들렸던 어느 가계
주차장 사이에 오래된 고풍스런 유럽풍의 건물과 그 옆으로는
고층빌딩이 하나 서있고 그 사이로 보이는 호숫가 수면이
하늘과 맞닿았다. 완벽한 하나의 수채화였다. 그 순간 호반의
수평선과 하늘의 일치를 바라보고 느끼는 것이 없느냐며
화두를 하나 던지셨다. 결국 못 맞추고 말았고 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가을이 자리한 거리에 어둠이 내릴 때쯤 바깥 공기는 차가워져
가고 있었다. 그 날 밤 저녁은 일식으로 하기로 하고 간 곳은
우리 동네에도 있는 일본 식당 토다이 물론 小食을 하는
사람에게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비싼 가격이었다.
식후 집으로 향하면서 들려준 이야기는 집에 초대되어
숙박하는 아주 드문 두 번째 손님이란 사실이다. 어둠을
뚫고 낙엽이 발목까지 빠지고도 남는 수목이 우거진 주택
가에 도착하니 우리 고향 캘리포어니어와는 완연하게 다른
모습에 마냥 낯설기만 하였다. 순간 자동차 뒷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고 대문에서 초인종을 누르는 동안 형수님이
어떤 분이 신지 하는 그 생각이 일말의 알 수 없는
불안으로 가슴을 뛰게 하던 순간이기도 하였다.
문을 여는 순간 수도원에서 오랜 수도생활을 하신 분 같이
해맑고 청초하고 순백한 들꽃 같은 지성적인 모습을 하신
형수님이 반가이 맞아 주시고 계셨다. "어서 오라 하신다"
순간 형님의 영식 미국 태생인 준이가 나와 놀랄만한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를 한다. 엄격하고도 자상한
아버지이심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순간 형님
내외분의 가정교육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얼마 후 차 한 잔과 음악을 놓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
먼 곳에서 불원천리 귀한 손님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 같이 절친한 분들 두 분이 늦은 밤에 인사 차
달려 오셨다. 그분들과 형수님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근처 학교 운동장 육상트랙을 찾아가 가을 바람
소슬하게 부는 달 빛 밑에서 트랙 돌기 경보로 운동 삼아
얼마인가를 돌았는데 아마도 최소한 20번은 아닌가 싶었다.
퇴근 후 운동 삼아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경보를
이 트랙에서 하신다는 형님..............그리고 낙엽이
뒹구는 희미한 가을밤 가로등이 졸고 있는 늦은 밤
돌아와 샤워 후 굿나잇 인사를 나눈 후 그렇게
우화의 강을 건너서 잠자리에 들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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