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사진작가 석이 형님
오늘은 매월 정기행사 중에 하나인 두 세대를 거쳐서 운영하고
있는 모국어 한국어 서점으로 외출하는 날이었다. 지는 보라빛
자카란다 낙화가 바람에 흩날리고 흔들리는 가지를 바라보며
운전하는 동안 가슴에 작고 큰 파문이 일어난다. 찬란한 보라빛의
향연이여 책이 들어오는 날이라고 크게 부쳐놓은 팻말이 정문을
딱 버티고 서있었다. 작고하신 최선생님의 가업을 이어받아 운영하는
아들 며느리와 직원들 손이 무척이나 바쁜 모습이다.
들어서자마자 늘 눈 여겨보는 서가에 작은 문고판 한 권이 놓여있다.
다름 아닌 몇 일전 작고하신 금아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집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딱 한 권이라 직감에 손에 들고
다른 책을 구경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누군가 집어갈 것 같아 들고
시집 코너에 서서 새로운 시집 이해인 수녀님의 맑고 고운 영혼으로
빚어낸 <작은 위로>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시인선 300호
기념집 <쨍한 사랑 노래>와 제 22회 2008년 소월시문학상 작품집과
매달 구독하는 문학사상과 현대문학을 찾아 들고서 발길을 옮기는
동안 러시아가 배출한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를 잠시
전문 월간지에서 만나는 기쁨을 누려본다.
서점을 나서 에스컬레이러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 음악전문점으로
발길을 향하는 동안 어느 고급가구 소품을 판매하는 가계의 쇼 윈도우에
내걸린 아직 후레임도 안된 어느 화가의 추상화 유화를 만나게 되었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그곳에서 정지되어 잠시
작품을 응시한다. 바탕색은 물론 붓질과 색감의 조화에 자신도 모르는
잔잔한 감동이 물결쳐 잔잔히 다가온다.
일단 발길을 음악전문점으로 옮기고 늘 가는 클래식 코너로 갔다.
오늘 유달리 미치도록 듣고 싶은 모찰트 피아노 콘체르토 15번
그리고 23번의 아다지오, 프라하 역사에서 플라터닉 연서인 일기를
잃어버렸다며 가슴 아파하며 독일어로 릴케의 시를 읽고 영어와
모국어 한국어로 그 시를 누군가를 위하여서 해석을 하여주며
이제 곧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젊은 날 그렇게 못다한 예술의 꿈을
위하여 미대를 다니시는 노신사 은퇴한 목회자이신 분이 생각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그분이야 말로 추상화를 하시며 미술사를 백인들에게
강의하시는 분으로 지성에 있어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분이
아니시던가.
모찰트 곡들을 눈여겨보는 동안 영국 데카 회사가 독일에서 발매한
필하모니어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대니얼 바렌보임과 피아니스트로서
블라드미어 아쉬케나지가 젊은 날 연주한 모찰트 피아노 콘체르토
전곡 열 장의 CD로 된 것을 만났다. 물론 지금은 아쉬케나지는
지휘를 병행하고 있지만 그의 젊은 날 작품을 만나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폐부 깊숙이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잠시 다시 눈을 돌려보니 하워드 쉘리란 아주 생소한 피아니스트가
스카트랜드 국립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콘체르토
1번부터 4번까지 그리고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Op. 43이
한구석에서 냉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왼 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 학부에서 공부할 때 그 당시 양부인 나의 아버지 파파는
컴퓨터가 막 출현하던 시절 손수 타자기로 타자를 치셔서 곡명을
적으시고 손수 녹음하셔서 학부생활 외롭지 말라며 차이콥스키부터
라흐마니노프까지 수 없는 곡들을 보내주시곤 하시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일부 학창시절의 옛추억이 그리운 순간이었다.
황량한 겨울바람이 북해로부터 불어오고 가랑비 내리던 날 월남에서
보트를 타고 목숨을 걸고 탈출해 말레이지아를 경유하여 피난 나와
형설의 공을 쌓고 있었던 V와 함께 런던의 웨스트 엔드에서 보았던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그 애절한 시대의 아픔과 거리들과 가을날
테임즈 강변의 포플러 나무들이 그리워 계산대로 들고 가 계산 후
귀가 하였다.
이방인이신 파파의 헌신적인 조건 없는 아가페 사랑과 인생의
안내와 배려가 없었다면 어쩌면 결코 내 인생에 만날 수 없었을 지도
모르는 라흐마니노프와 클래식 음악들 그리고 문학과 예술로 이루어
지는 지성의 숲이 우리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향기는 그윽하며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가꾸어준다.
사회와 국가가 부강해지고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수준이 올라가면
상승된 문화수준은 예술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요구하게
된다. 아마도 그런 현상은 서구 사회의 명문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귀향한 재벌 가문 3세들의 미술분야 투자에서도 그 맥락을 찾을 수
있으며 서구화 내자는 글로벌화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의미에서 모국어로 된 시집들과 산문집들이나 기타 서적들을
만난 지도 22년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Boxing day 였던
그날이 없었다면 아마도 모국어는 벌써 멀리 거센 세파에 밀려
씻겨 내려가 내 기억의 상층부에서 사라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날 파파가 어느 한국인이 경영하는 상점 밖으로 허리춤을 잡아
끌고 바깥으로 나가 혹독하게 야단을 치시지 않았더라면 영어
바다에 빠져서 익사하고 말았을 그 아스라한 지난 시간들을 회상하며
자신은 현기증을 느낀다.
이 밤 손에 들고 읽고 있는 2008년도 소월시문학상 작품집이나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집을 나는 들었더라도 읽지도 못하였을 것이며
읽는 다 하여도 무슨 소리인지 그리고 뜻인지도 모르는 눈뜬
봉사였을 것이다. 귀는 콱 막혀서 무슨 소린가 하고 눈만 멀뚱
멀뚱 뜨고 있었을 것이며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반면에 학부에서 배웠던 모든 것들을 생각할 때 초토 교수님의
충심 어린 충고와 안내와 배려가 없었다면 비폭력저항의 산
교육서인 <시민 불복종>이나 <월든> 같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사상집은 결코 만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소로우의 작품을 읽지
않고는 지성을 결코 논할 수 없다고 하셨던 초토 교수님도 이제는
한 생애를 맞추시고 떠나시고 역사의 뒤안길에 계실뿐이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지
않고는 결코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는 교양을 위한 시간과 경험을
얻기라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부지런하여야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하고 집안 가사일도 돌보고 취미생활도 하고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이 가능하지 그렇지 않고는 그 어느 것도 우린 핑계와 더불어
성취할 수가 없다. 즉 자기 스스로 기만하게 된다.
세월은 잠깐 사이에 저만치 흘러가고 소년이 청년이 되고
청년이 중년이 되고 중년이 장년이 되고 그렇게 흐르다 우리는
우주에서 와서 우주 안으로 다시 소멸되어 영원으로 귀속한다.
그 영원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경험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다만 영원은 영원 일뿐이다.......종교를 들이대기 이전에…
우리의 인격은 우리가 살아온 환경적 요소와 직접적인
절대성을 갖고 있다 할 수 있지 않을 까 싶다. 출생부터
가정, 학교, 부모님들과 형제들의 모습과 그 영향권과
사회와 국가와 문화적 배경과 개 개인이 보고 경험하고
배우고 익힌 만큼의 크기와 모습이 즉 한 인격체가 아닐까?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만큼의 크기로 사회와 세상을 바라보고
대인관계를 정립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가문을 따지고
학벌을 따지고 출생배경과 각종 틀 안에서 저울질 하고 그래서
유유상종이란 말도 있는 것이리라 인간은 끝없는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 몸이 쇠잔하여 움직이지도 못하고 사람도 못 알아보고
대소변도 못 가리고 하기 전에는 스스로의 행복과 평안과
안식을 위하여서 자기관리에 철저할 필요가 있다. 아니고서는
인간다운 삶과 일상과 충만한 영혼과 이지와 지성으로 살아가기에
역부족이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리고 한국인들처럼 명품이란 중병에 걸린 사람들도 지구촌에
드물지 않을 까 싶다. 여주 명품 아웃렛 샤핑몰이 연일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명품은 동이 날 지경이라는데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명품이 행복의 척도일까?
사치와 허영이란 껍데기를 쫓기 이전에 한 권의 수필집이나
시집을 손에 들고 그 안에서 작은 행복 그러나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일상의 모습이 더 소중하지 않을 까 교육적인 차원의 시각으로
바라보아도 그렇다.
영혼을 살찌우는 이지와 지성도 절대 불가결하게 필요하며 요구된다.
물질이 넘치고 처져도 정신적인 평안과 행복이 없다면 부귀영화,
권력과 명예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각자 인간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Paul Cezanne - Still Life with Soup Tu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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