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사진작가 석이형님
<구도자를 위한 저녁기도 KV. 339> 과 야상곡의 에스프리
침실 창밖에 보이는 나뭇잎도 이제는 연초록 빛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올해는 다른 해와는 유달리 가뭄으로 물 부족으로 공공기관에서는 물 사용을 줄이라고
캠페인을 벌리고 있다. 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인간의 정신 세계는
문명과 하이텍의 발전만큼 따라주지를 못하고 있다.
오히려 역으로 더욱 더 인간들은 극단의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가치관으로
흐르고 있고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어 따듯하고 인간적인 만남과 감성의 교류 상실되고
이해관계와 더불어 우정도 사랑도 이웃사랑도 득실을 따지는 때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우울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인간관계를 소중히 생각하던 가치관이나 시각은 마치 구세대의 유물처럼
가차없이 자신의 필요와 감정 그리고 편리에 따라 내팽개치다 못하여 패대기 치는
슬픈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조그만 일로 상심하고 실망하고 배신을 가차없이
때리는 시대에 오늘의 적이 내일에 아군이 되고 오늘의 벗이 내일은 철천지원수가
되어 서로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살아가는 삭막한 인간성과 기본적인 상식과 에티켓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시대가 오늘의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많은 부분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어제는 우연히 한국어로 된 한국현대미술계에서 추상화의 대가들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이우환, 윤형근, 박서보등등 아 그런데 한 이름에 시선이 갑자기 멈춰졌다 . 멈춰진
작가의 이름을 몇 번 되뇌어 보았다. 순간 '아 선생님…………" 할 수 밖에 없었다 .
추상화 분야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화가 그 이름 "권영우" 아주 오래 전에 이분에
대한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그 당시 학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고 선생님은 파리로
건너가셔서 이미 작품활동을 한참 하시고 계신 시절이었고 지금은 80초반의
노화백이시지만 그 당시는 아직도 젊으신 50대말 이실 때였다.
파리에 계신 선생님께 영어권에서 편지를 드린 적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친히 화보와 정갈한 필체로 글을 보내주셨다. 그리고 그 후 환경의
변화로 선생님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아 그런데 어제 선생님의 글과 근황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가 있었다. 언제나 조용하시고 단아하시며 더없이 겸손하신 한국 현대
미술을 이끌어 나가시는 화가이기 전에 지극히 인간적이시고 모든 이들에게 타의 모범이
되시는 白鶴 과 같으신 이 시대의 어른이라 하시지 않을 수가 없는 분이시다.
서울시립미술관에 평생의 역작 70점을 기증하셨다고 한다.
그것도 기꺼이 선생님의 작품을 전시하여준 시립미술관 당국에 대한 호의에 답례로
많은 미술애호가들과 한국 국민들을 위하여서 무상으로 기증하셨다는 기사를 접할
수가 있었고 현 서울시장으로부터 그에 대한 감사패를 받으시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접할 수가 있었다.
사진으로 만난 선생님은 이제 고희를 넘기시고 단아하신 모습의 노인으로 감사패를
받으시고 계셨었다. 얼마나 잔잔한 감동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득한 추억 속의 선생님이
한국 추상화 미술계 대가로 오늘날 우뚝 서계신 모습과 더불어 세월의 무상함 앞에서
늙어가시는 모습이 못내 아쉽다.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지극히 인간적이시며 겸손하신
늘 같은 모습에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술가 이시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조용하시고 겸손하신 지극히 인간적인
어른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이 꽃보다 아름다운 모습은 바로 지극히
인간적이며 겸손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요즘이나 과거나 세태가 튀고 싶어
순수예술 분야에서도 상을 팔고 사는 시대에 고고한 학처럼 조용히 자신만의
구도자적인 순수예술의 길을 걸어가시는 선생님은 이 시대 몇 안 되시는 귀한
지성과 예술의 구도자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에게 겸손보다 더 아름다운 향기가 있을까?
조금만 알아도 때론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야수와 같은 경망스러운 존재의 가벼운
오만과 방자함으로 타인에게 무례한 처신과 행동을 하는 그 누군가를 어렵지 않게
우리 생활주변에서 만날 수 있지 않던가?
고집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져 타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게 될지는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자기 기분에 따라서 경솔한 처세로 타인에게 상처나 아픔을 주고 누를
끼치고도 그것을 누라고 생각하지 않는 가벼운 한 인간의 생각지도 못한 숨겨진
또 다른 내적인 모습을 만날 때면 우린 망연자실하고 만다. 양면성을 지닌 것이
인간이라면 그것을 절제할 줄 아는 지혜도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가고 기계화 되어가는 이 첨단시대에 사는 우리는 늘
바쁜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왜 우리는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하여서 존재하여야 하며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본능에만 의존하여 살아가기에는 인생은 너무나도 짧고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주검은 곧 존재의 상실이다. 그 순간
영은 떠나고 인간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쓰레기로 변하여 자연으로 돌아가
흙 보탬이 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의 추구와 존재의 의미도 우리가 호홉을 정상적으로 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갈 때만이 존재 가능한 일이며 추구가 가능한 일이다.
이런 부인할 수 없는 명제를 앞에 놓고 잠시라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를 뒤돌아보며 잠시라도 내적인 충실함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의 여백이
절대 필요하다. 그뿐이랴 사랑하는 형제자매나 부모님이나 이웃들과 귀한 인생의
인연으로 맺어진 그 인연들을 소중하게 지켜나가며 함께 우화의 강물로 흐름도
우리 내면의 충만과 평안과 행복을 위하여서 절대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아마도 이럴 때 우리의 영혼을 포근히 감싸줄 수 있는 음악이 있다면 아마도
쇼팽이 야상곡을 작곡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이랜드 출신의 작곡가
John Field의 야상곡
애수가 담겨 있다면 John Field의 야상곡에는 잔잔한 평안과 기쁨 넘치는
평화와 행복이 담겨져 있어 우리를 잔잔한 쉼터로 안내한다. 그리고 Mozart's
"Laudate Dominum", from the "Vesperae de Confessore", KV. 339, 어느
<구도자를 위한 저녁기도 k. 339>는 우리를 한없이 경건하게 한다. 마치 어느
중세시대에 건축된 수도원 뒤뜰을 산책하고 있기라도 하듯이 그런 차분하고
우리의 옷깃을 잠시나마 여미게 하는 함축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마치 우아하고
애잔한 감성이 담긴 백장미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세속에서 생존을 위하여 우리는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부딪쳐야 한다면 우리는
역으로 순수지향을 위한 영혼의 정제와 순결도 필요하다. 아니고서야 세상은
모두가 악으로 채워지고 들끓고 혼돈 그 자체에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영혼이 맑고 순수한 사람을 만나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를 늘 잔잔한
감동의 파문으로 이끌어내는 동기부여가 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고
정의와 불의를 가려낼 줄 아는 양심과 의식을 갖고 향기로운 일상의 매너와
에티켓으로 누군가를 만나 더불어 살아가며 따듯하고 배려 깊은 사고와
가슴으로 살아간다면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우리 모두 잔잔한 행복의 호숫가
그 벤치에 앉아서 인생의 의미와 존재의 의미를 작으나마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잔잔히 흐르는 John Field’s Nocturnes의 선율 앞에 한잔의 향기 나는 커피는
백장미가 건네주는 그윽한 미학적인 아름다움과 향기와 전혀 진배없다 싶다.
따듯한 가슴과 깊은 배려가 앞서는 순수하고 진솔한 인간관계는 일상의 쉼터요
향료와 같다. 인간이라면 진실하고 진솔할 필요가 있다. 진실된 삶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서도 더욱이 그렇다.
여러분에게 John Field의 야상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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