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우연히 언론매체에서 난데없이 꽃동네를 설립하신 오웅진 신부님에 관한
악의적인 기사를 읽고 나 또한 얼마나 경악을 금치 못하였는지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그분이 그럴 리가 하며 못내 가슴을 쓸어 내리던 기억을
오늘 아래 기사를 읽으면서 되돌려본다.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게 되어 있다면 그 동안 악의적인 관료주의와
상업주의에 물든 세태와 업자들의 농간에 정신적인 피해는 물론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대한민국에 전후 무후한 홈리스들을 위한 자선공동체인 꽃동네에
입힌 손실은 막대하다.
수억 만리에서 달려갔던 그곳 그리고 곁에서 함께 하였던 신부님과 캐톨릭 의대를
졸업하고 공중보건의로 자발적으로 꽃동네에서 봉사하시던 닥터 리 끝내 그분은
성소의 부름을 받고 수도자의 길을 의사로서 걸어가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월간지
샘터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꽃동네 안에 설립된 인곡자애병원 병실 벽에
걸려있던 수도자를 위한 기도문이자 한편의 시를 아직도 생생하게 나는 기억하고
있다. 수도원의 지하실에 위치한 기도 실에서 원장수녀님과 신부님이 특별히
바치시던 성소를 위한 청원기도를 나는 내 생애 마지막 그날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인도 캘커타에 위치한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사랑의 선교회를 기억하면서
A 박사님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갔던 가을과 겨울의 그 경계선에서 오르던
산길과 산 너머에 자리하고 있던 정신지체장애자들의 요양원과 욕창으로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던 병실과 수많은 영혼들을 거두어 주시던
수많은 봉사자들과 수사님들과 수녀님들과 신부님 그리고 복도에 나 뒹굴던
버림받은 영혼들의 대변들을 나는 오늘도 기억한다.
밥 한 공기에 무우 하나 배추 몇 잎으로도 가슴 절절하게 감사하였던
그 해 겨울의 병실을 기억하며 오늘도 나는 그 영혼들을 기억한다.
그들 보다 도 갖은 것이 너무나도 너무 나도 더 많은 나의 실존 앞에
나는 더 한없이 낮은 곳으로 임하여 함을 오늘 그리운 신부님과의 지난
날들을 추억하며 가슴에 각인한다. 인생은 유한하다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더 더욱이 소중하고 절실하게 오늘 같은 세태에 요구된다.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죽는다.
세계의 부호가 된다고
세계의 명사가 된다고
권력을 손에 쥔다고
부자가 되어 몇 십억 몇 백억 저택에 산다고
인생에 대한 진실을 진정으로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우리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각자 소속된 사회와 공동체와 서있는 곳에서 소외되고
외롭고 고독하고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는 이웃들을
기억하며 긍율히 여기며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
진정으로 신앙인의 자세요 인간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신부님과 함께 하였던 수도원과 병실에서의 흘러간 시간들은
내 생애에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자아성찰을 하게된 시간들 이었다.
음성 꽃동네, 가평 꽃동네 공동체 위에 그리고 수용된 수많은
병들고 죽음만을 때로는 기다리는 행려병자와 버려진 영혼들
위에 평화와 안식이 영원히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모든 세간의 모함속에서 긴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오신 공동체의
가장 큰 일꾼이신 오웅진 신부님과 봉사자들 위에도 영원한
마음의 평화와 생의 깊은 의미와 축복이 영원히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진정한 신앙은 언행의 일치요 베네딕도 수도회의 지극히
높은 기본정신인 청빈하고 가난한 영혼의 삶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형 교회첨탑 위에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그분은 거하시지 않는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가벼운 세치혀와 잔머리와 요란한 말의
잔치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진정한 행함이 병행하여야만이
그 의미를 갖고 있다. 모든 신앙공동체는 더욱 더 낮아저야
하며 더 가난한 마음과 모습으로 세상과 민중들 앞에 서야한다.
“30년 전 초심으로 남은 소명 다할 것”
초기 후원금 年20억씩 급감…꽃동네 망한다 소문도
고통 준 사람 용서하지만 사랑하려면 시간 더 필요
“이제야 구름이 걷히고 안개도 비로소 사라진 것 같습니다.”
지난해 12월 27일 대법원에서 업무상 횡령과 사기 등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이 확정된 데 이어 최근 8년간을 끌어 온 인근 광산을 상대로 한
광업권 설정허가 및 채광인가 취소 행정 소송에서도 고등법원의 원심판결을
뒤집는 대법원의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아낸 꽃동네 오웅진(64) 신부는 담담한
어조로 소감을 말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이’들의 보금자리였던 꽃동네가 ‘비리의
온상’처럼 비치고 설립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오 신부가 ‘파렴치한
사기꾼’처럼 매도돼 온 혹독한 세월을 그는 묵묵히 견뎌냈다. 꽃동네를
옥죄던 송사에서 벗어났으나 인터뷰를 고사해 온 그가 한밤중 찾아간
기자에게 비로소 그간의 심경을 털어놨다.
2000년 10월 12일 충북 음성 지역 문화행사에 참석했던 오 신부는 우연히
군청 측이 꽃동네 인근에 광산을 허가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혹독한 ‘시련’의 시작이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해당
행정기관에 이의신청을 내 지하수 및 환경보전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행정소송을 내게 됐다.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계속되던
2002년 5월 21일 경찰과 군청 직원들이 합동으로 꽃동네에 들이닥쳤다.
청와대에 오 신부에 대한 횡령 및 부동산 투기 의혹과 불법 산림훼손에
관한 진정서가 접수됐다는 것이었다.
경찰조사 결과 ‘무혐의’로 결론 났으나 검찰은 사건을 넘겨받아
꽃동네에 대한 계좌추적 등 전방위 내사를 시작했다. 2003년 1월 21일에는
한 인터넷 매체와 방송사에서 ‘오웅진 신부 34억 원 횡령 의혹’이라는
뉴스가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꽃동네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됐고
오 신부는 곧바로 ‘죽일 놈’이 됐다.
“2002년 120억 원에 달했던 후원금이 다음 해 100억 원으로 떨어졌고
해마다 20억 원씩 더 떨어졌습니다. 정기적으로 회비를 내던 회원이
15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급감했지요. ‘꽃동네가 망하고, 인근 주민들은
다 이주하게 된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4000여 명의 가족이 살고 있는 꽃동네는 ‘현상 유지’조차 힘겨워 졌다.
검찰은 꽃동네 수도자 등 300여 명의 참고인을 조사해 1만5000쪽 분량의
방대한 수사기록을 작성해 오 신부와 수사, 수녀, 주민, 환경운동가 등
5명을 업무상 횡령과 업무 방해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오 신부 등에
대한 1심 공판만 2년에 걸쳐 27회가 열렸고, 그는 그때마다 법정에 출석해
재판을 받아야 했다.
8년 만에 ‘명예’를 회복한 꽃동네는 설립 32주년인 이달 8일 비로소
성당과 수도원, 수녀원 등 남녀 수도자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가난한 사람을 구원하려면 가난한 사람보다 더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오 신부의 지론에 따라 그동안 300여 명의 꽃동네 수사와 수녀들은
가족들의 공간에 얹혀살거나 옥상의 조립식 가건물 등에서 생활해 왔다.
“수도자들에게 ‘한 사람도 버려지는 사람이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같이 우러름을 받는 세상’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세상’을 위해
헌신하자고 당부했습니다. 저 또한 1976년 전 재산 1300원으로 꽃동네를
시작할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제게 맡겨진 소명을 다할 것입니다.
제게 고통을 준 사람들을 용서하지만 그들을 사랑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듯합니다.”
음성=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출처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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