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귀한 시간 나누어 헤르만 헤세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가 출생한
남부 독일 Calw로 부터 시작하여 그가 4살 때 부모님 따라서 이사를 갔던
스위스 바젤로 그리고 그의 생애 마지막을 보냈던 이태리어 권의 스위스
몬타뇰라로 발길을 옮기며 헤세와 로맹 롤랑의 우정과 에밀 졸라와 인상파의
대가 화가 세잔의 특별한 우정 그 지고 지순한 인간의 참된 삶의 향기에 심취하고
있을 무렵 깊어 가는 밤 문득 때아닌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린다. 전화래야
올 곳이 뻔한데 누구지 하고 수화기를 드는 순간 이게 왼 일 생각지도 않은
전화가 아주 멀고도 먼 외지에서 왔다.
약간은 숨찬 음성으로 귀가길인데 몇 일전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사정상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마음 한 켠이 그랬고 문득 그리운 음성이
듣고 싶어 전화를 하였노라고 한다.
“뭐하고 있니?”
“응, 지금 헤르만 헤세를 만나고 있지 온종일 뒹굴면서 헤세의 일생을 만나고
그의 시를 읽고 있었어. 아 그리고 헤세와 전혜린이 편지를 주고 받던 사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대단하지…그것도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한 작가와 두 지성이
주고 받았다는 사실은 아주 작은 나라 한국 같은 데서 그 시대에 비추어
대단한 일이 아닐 수가 없지……아 그리고 헤세는 참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냈어.
조부는 인도에 선교사로 가 있었고 어머니도 인도에서 출생하고 헤세의 아버지도
선교사로 일을 하였고 부모님들은 집안의 전통인 선교에 종사하기를 원하였고
헤세는 그렇지 못하였고 부모님 뜻에 따라 신학을 공부하다 학교에서 마찰이 생겨
하룻밤 학교에서 뛰쳐나가 다음날 들판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끝내 신학교를 그만두고 말았지 학교를 나온 후 어느 5월 자살을 기도하였고
그 후유증으로 그는 정신과 병동으로 옮겨졌었고 그런 여파로 그는 나중에
칼 융과 조우를 하게 되고 그 모든 것들이 후일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지.
헤세는 자식을 세 명을 두었는데 하나는 지독히 아파서 병치레 하기 바빳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리고 결혼을 세 번씩이나 하고
첫 부인은 정신분열증 환자였고 그 결과 가정은 깨지고 두 번째 결혼생활도
실패하고 아 그런데 왜 문학과 예술의 거봉들은 한결 같이 공통적으로 신학을
공부 하였는지가 궁금해 빈센트 밴 고흐, 후리드리히 횔덜린도 헤세 자신도
모두 신학을 공부 하였었다는 사실이지.
그리고 이런 모든 아픔들이 헤세로 하여금 정신분석학에 심취하게 만들고
칼 융과 가까워지는 동기를 제공하게 되며 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관심도
갖게 되고 나중에 인도네시아와 스리랑카를 여행하고 돌아와 그는 그의 명작
<싯다르타>를 집필하게 되었고 나치 독일로부터 박해를 받아 그의 글은
잠시 빛을 못 보게 되어 스위스에서 글은 먼저 출간되고 1923년 스위스로
귀화하였고
나치 독일 하에서 독일의 극작가 베아톨트 브레히트와 작가 토마스 만
이 두 위대한 시대의 작가들의 스위스 망명을 헤세가 도와주게 되었고
토마스 만은 헤세 보다 먼저 1929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2차 대전
동안 나치를 피하여 스위스로 망명을 한 토마스 만은 1939년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1952년에 스위스로 돌아가 취리히에서 그의 생을
마감하였지 그리고 헤세는 그 후 늦게1946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고…
동시대에 나치를 피하여서 후로이드의 자손들 특히 건축가였던 작은 아들
에른스트 루드비히 후로이드가 런던으로 건너가는 동기가 되고 영국에서
건축가로서 탄탄한 기반을 잡자 그의 아버지 후로이드와 여동생 애나 후로이드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고 살아가게 되었어 그리고 후로이드의 아들
에른스트는 아들만 셋에 첫째 아들 스티븐, 둘째 아들 국회의원이요
방송인이요 유명한 요리사요 작가였던 유명한 클레멘트 후로이드와
사실주의 화가로서 오늘날 21세기 화단의 대가인 루시안 후로이드
이렇게 후로이드는 작은 아들 에른스트로 부터 손자 셋을 두었고
에른스트의 아들 매튜 후로이드 그러니까 지그문트 후로이드의 증손자는
귀족하고 첫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세계적인 언론 재벌인 호주의
루퍼트 머닥의 딸과 결혼해 현재 사돈관계가 되어 있지..
후로이드가 아들과 같이 살던 런던의 햄스테드 집은 오늘날
후로이드 박물관으로 남아 있고 후로이드가 정신분석학으로 비엔나에서
살 때 사용하였던 모든 가구와 이집트, 로마, 그리스 시대와 동양의
유물 수집품들을 그대로 소장하고 있어 런던에 가면 가볼 만한 곳이
아닌가 싶어…후로이든 자손들은 영국에서 대단히 성공을 거두었고
앵글로 색슨이 아닌 영국인으로서 영국 사회 안에 명문가로 자리를
견고하게 잡고 있지.
그 가운데 화가 루시안 후로이드를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생존작가로서 가장 비싼 작품 값을 받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의 작품 하나에 작게는 수백만 파운드에서 많게는 천만 파운드가
넘어가고 유명인사들이 많은 경우 이 작가의 누드 모델이 되었거나
되고 있다는 사실이지
지금 25세의 젊은 여류화가가 그의 새로운 누드 모델로 작품을 창작하고
있는 데 완성되면 경매에서 천오백만 파운드를 호가할 예정이라고
하는 데 그의 작품 <Benefits Supervisor Sleeping>는 러시아의 신흥석유재벌
이자 영국 첼시 팀의 소유주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삼천만 불이 넘는
가격에 경매에서 팔리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형 스티븐과
동생 클레멘트가 그의 성공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가운데 둘째 아들인 화가 루시안을 서자라고 거짓말을 대중 매체에
하여서 논란을 일으켜 결국 두 형제들 하고 의를 끊고 사는 은둔적인
고독한 화가이기도 하지.
아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지그문드 후로이드는 무신론자였어.
그리고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시가 흡연으로 구강암으로 얼굴에
구멍이 날 지경까지 이르러 생을 마감하는 처절한 최후였고…
그리고 초상화를 많이 그린 루시안의 작품 가운데 하나로서 뉴욕의
고서 희귀본 딜러였던 베를린 태생의 유대계 백만장자 버나드 브레슬라우어의
초상화는 작가가 모델의 비만으로 주름진 턱을 마음에 들지 않게 그려서
작품이 완성될 당시에도 모델인 본인도 마음 내켜 하지 않았지만
2004년 백만장자가 86세로 맨해튼에서 죽기 바로 4년 전에 자신의
초상화를 망가트려 쓰레기통에 버린 사실을 후일 루시안의 작품을
종합적으로 모아서 전시하려던 전문가에 의하여서 발견된 후 작가는
무척이나 실망하고 가슴 아파하였다고 하더라구..
그리고 또 다른 영국 화가 그레이햄 서덜랜드가 그린 윈스턴 처칠 경의
초상화와 같은 운명 이었다나 처칠 경의 사후에 그의 부인 클레멘틴이
남편의 초상화가 마음에 안 들어 불질러 버렸다고 하고 그런데 주변의
입방아들이 하는 말은 이 작품들이 싫으면 도로 팔던지 하였더라면
아까운 작품은 남았을 테고 지금은 수백만 불에서 수천만 불이 가치가
되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을 텐데 하는 거였고 많은 경우 있는 자들이
그렇듯이 백만장자가 성질이 고약해 하다 못해 산책도 늘 혼자 하였다고 해
글쎄 자기가 돈 주고 산 자신의 초상화가 비록 작품이지만 쉽게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말을 하기는 쉽지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야..”
“그래 맞아 군중 속의 고독………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데도
내면이 채워지지 않는 그 텅 빈 느낌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고
말고 그런 것이 술 한잔으로 함께 하는 저녁이나 놀이와 시간으로 보편적인
친구라고 호칭하는 관계나 사업관계로 만나는 인간관계로 채워질 수
있는 성향의 것이 아니고 말고 진정한 내면을 나눌 수 있는 대상 그 의지와
둥지가 될 수 있는 대상 즉 인생의 지기만이 채워줄 수 있는 일이지
그런 그리움의 대상 그래서 네 음성 듣고 싶어 전화 했다. 문득 바람이
불거나 계절이 바뀌어도 문득 문득 그리운 사람 말이야….”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야………좋은 시를 읽어도 말러 교향곡을 들어도
생각이 나지 들려주고 싶고 서로를 절실한 감성으로 그리워 할 수 있씀에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지…커피 너무 마시지마 나는 하루에 딱 정량이
머그 잔으로 한 잔이면 족해 그런데 블랙으로 네 다섯 컵 너무 많아
위 망가져…부탁이니 건강을 생각하여서 아무리 경기가 나빠 요즘에
스트레스를 받아도 제발 줄여 너무 마시지마 이제 이 삼 십대도 아니고…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우리 서로 잘자, 굿나잇….”
이렇게 한밤의 대화는 끝나고 몇 일이 지난 출근길 FM 클래식 방송에서
화가 훼르난도 보테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 가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이런 이런 바로 우리 동네근처 어딘가에서 작품전시회를 한다고
방송을 내보내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에 바우어스 박물관이란 말이
흘러나왔다.
아……ㅁ,
퇴근 후 찾아보마 하고 출근 길에 오르고 하루를 맞추고 퇴근 후 찾아보니
외곽도시의 미술관에서 막 17일 전 주에 작품 전시회를 시작으로 12월 6일
까지 한다고 미술관 안내판에 광고문이 올라와 있는 것은 물론 같은 미술관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현대 미술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거장들 디에고 리베라와
후리다 칼로의 작품을 시작으로 줄줄이 사탕으로 유명작가들 작품을 한데 모아
전시회를 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 내가 자신에게
스스로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1년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세월이었고 마음도 많이 아파야 하였던
시간들과 어깨도 많이 무거운 난제들이 예고도 없이 해일처럼 자신 앞에
밀려왔던 시간들 그리고 현재진행형 앞에 어느 정도 초연해질 수 있게 된
시간 앞에 지나온 인생길을 뒤돌아 보며 남은 날들을 위하여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남은 도전을 하여야 할까를 생각하게 되는 날들이 전 보다는
많아짐도 세월의 성상 탓이리라. 문득 하나님, 저도 때로는 위로를 해주어야
하는 입장에서 위로를 받고 싶을 때도 있답니다 라고 지난 몇 일간 긴
침묵 속에 가을의 문턱에서 독백을 하였다.
가을이 깊어지기 전에 21세기의 거장 남미 콜롬비아 태생의 화가
훼르난도 보테로의 영혼이 깃들고 손때가 묻은 작품을 만나러 가야 하겠다.
그래도 생은 살아 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 까…. 과연 에밀 졸라의
일편단심 변함없는 지고 지순하고 순수한 우정과 인간적인 사랑과 격려가
없었다면 그리고 부인의 헌신적인 사랑과 격려가 없었다면 미대 입학에도
불합격 하였었던 인상파의 대부 세잔의 눈부신 예술혼이 만개할 수 있었을까?
세인의 눈길과 관심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던 만인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두 지성의 우정이 극단의 이기주의와 이해관계로 눈이 멀어가는 이 시대
인간의 심성과 사랑과 우정의 방법론에 몸과 마음도 지치고 허 하였던
침묵의 시간 속에 가을 빛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이런 지성 조차도 없었다면
어찌 유한한 단 한번의 생애 가운데서 출생 학창시절 결혼과 가정 그리고
직장생활과 은퇴란 모노 톤의 인생을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싶다.
허우적대다 가는 것이 인생은 아닐 진데.. 의미 있는 삶과 인생이란
과연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까...그 색깔은 무지개 빛 빨주노초파남보가
아닐까...개 개인마다 갖고 살아가는 인생철학과 시각 그리고 가치관도
천 층 만 층 구만 층 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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