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날의 꽃은 카네이션이라면 아버지 날의 꽃은 장미다
J와 한 직장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지도 어언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차다.
일주일에 두 번을 만나 함께 근무하는 그녀와 일주일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우리는 그 두 번 만나는 시간에 온갖 농담과 우스개 소리로 다 날려버린다.
때로는 직장의 천장이 무너질 정도로 박장대소를 하게 서로 만들어 웃겨주고
웃고 한다. 퇴근길은 월요일에 있을 연구보고서 브리핑으로 이미 머리 속이
복잡하다 못해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창 밖을 내다보니 가을비가 내려서
대지가 물기로 촉촉하다.
문득 비는 오고 추워지는 날 맥주 한잔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그래 퇴근길 FM 91.5 에서는 잔잔히 클래식이 흐르고 있고 마실 우유는
물론 아침 식사를 위한 빵도 필요하고 내리는 빗속을 걸어가는 것이 아닌
차를 몰고 가는 길 위에 어둠이 내리고 텅 빈 거리 대지는 목마름을 달래며
가을비는 내리고 있었다. 슈퍼 마켓을 한 바퀴 훠이 훠이 돌아보니 이런
내가 늘 마시는 회사제품의 랙토스를 뺀 우유가 없는 것이다. 순간 낭패감이
들려는 순간 다른 브랜드의 같은 종류의 우유가 있기에 집어 들고 다른 골목으로
발길을 옮겨 맥주가 아닌 적포도주를 손에 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이번에는 호주에서 생산된 적포도주 캐버넷을 들고 빵과 함께 계산대에서
계산을 맞추고 귀가 길에 올랐다.
온몸과 마음에도 피로가 밀려오고 있었다.
직장생활에 학교생활에 주변을 돌보며 살아가야 하는 일에 한 몸으로 세
네 가지를 하여가며 살아가야 하는 일상이 쉽지만은 아닌 일 그러나
묵묵히 감당하여야 하는 일 잠시 적포도주를 오랜만에 한 잔을 부어
음미하는 순간 이런 남반부 호주대륙의 태양으로 살신성인 자신을 지켜온
포도주 한 모금이 목 젓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특유의 향과 맛이란 가히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적포도주만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감칠맛을 갖고
있었다. 바로 이 맛에 때로는 적포도주를 한 잔 음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하지 않을 수가 없지 하는 독백을 마음으로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아침에 있어야 할 연구보고서 브리핑이 마음의 부담감으로
다가오는 순간 피로가 밀려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얼람을 해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를 지났을 까 아침결에 전화벨이 난데없이 울린다. 아니
이 시간에 누구지 하는 일말의 불안함과 더불어 잠자다 말고 떠지지 않는
눈과 더불어 수화기를 들었다.
“헬로우!
나다…”
이런 순간 깊고 엄숙하며 무게가 느껴지는 점잖은 한국어로 들려오는 목소리
누군지 알 길이 없어 당황을 하면서 다시
“후 이스 디스?” 누구시죠 하고 영어로 되물었다.
“아버지다…………자고 있니?
아………아버지, 네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막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고 학교를
가야 하는 시간이어요”
“도무지 소식이 없으니 아버지가 궁금하잖니 그래 어떻게 지내니…
저 잘 있어요.
그런데 왜 소식이 없니……
아버지, 이 나뿐 아들이 아버지 생신 날을 잊어버렸잖아요.
그래서 아버지 ...........죄책감에..................차일 피일 하다가 전화 못 드렸지요.
뭘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니 아버지도 그 동안 얼마나 바빴는지 정신을 못 차렸다.
잘 있고 아무일 없으면 됐다. 아버지도 그런 것에 올해는 신경 쓸 여가가 없었다.
괜찮다.
아버지, 전화 끊으세요. 제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
그래 알았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서울로 전화기를 들었다.
아니 시간을 보니 밤 12시가 되어가는데 우리 아버지 안 주무시고 뭐하시고
아들한테 이 시간에 전화를 하시지 하는 생각이 앞섰다.
전화벨이 울리고 다시 아버지가 전화를 받으셨다.
“그래 나 다…아무 일 없으면 됐다.
얘야 소식이 없으니 아버지가 궁금 하잖니…
아버지, 아버지 목소리를 들으니 이제 살 것 같아요.
아버지, 그런데 우리 동생들 잘 있어요?
그래 다들 잘 있다.
내년 봄 5월에 공부 끝나면 내년 못 가면 후년에는 아버지한테 갈께요.
그리고 아버지 우리 다시 아버지가 다시 가보고 싶어하시는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에 가야죠.
아버지,
여기는 아침 7시 25분 이고 아버지 시간으로 밤 11시 25분이 되지요.
그래 다시 통화하자 그리고 너 아무쪼록 몸조심 해라 알았니…
건강 자신하면 안 된다…이제 너도 나이가 있지 않니..
그럼 끊는다….
아버지, 건강하세요. 사랑해요.
다시 전화 드릴게요.
그래 잘 있거라.”
수화기를 놓고 집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간신히 학교에 도착하고 수업은 시작되고 첫 브리핑을 데이빗이 시작하였다.
다음은 우리 차례로 한 학기를 마무리 하는 브리핑을 맞추고 나니 긴장이 풀린다.
수업을 맞추고 밖으로 나와 주차장을 향하여 발길을 옮기니 이런 봄에 피고
진 자목련이 다시 피어나 간밤에 내린 비를 맞고 그 무게를 못 이기고
낙화가 되어 보도에 나뒹굴고 바람은 어찌나 센지 강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드높고 오랜만에 다 내린 양쪽 차 창문으로
늘 그렇듯이 비가 내린 후 우리 지방특유의 계절풍이 불어오며 온 세상의
가을을 먼지바람으로 들어 올리고 낙엽들은 바람결에 정처 없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나뒹굴다 못해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음성은
온종일 긴 여운으로 남아 아직도 귓가에 윙윙거리고 있었다.
유년시절 스승과 제자로 출발한 인생 여정은 어느 순간 과거로 남겨지고
아버지와 아들 자리만 남아서 언제나 한결 같은 지고 지순한 사랑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은 아버지를 영원을 함께 하며 세월을 함께 시공간을
초월하여 살아왔고 현재진행형으로 살아가고 있다. 영원한 인생의 사표요
자상하시고도 엄격하신 아버지 지금도 아들이 서울을 가 외출을 하면
하루에도 두 세 번은 전화로 위치 확인을 하셔야 안심을 하신다. 이 못난
아들을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하시는 아버지 오랫동안 소식이 없는 아들이
궁금하셔서 참다 못 하시고 결국 깊어가는 가을 길목에서 전화를 하시고 말았다.
참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아주 오래 전 서로 타인으로 만났다.
그러나 세월과 참사랑은 우리를 영원한 아버지와 아들로 그 인연을 맺어 놓았고
암으로 돌아 가시기 전에 너를 보고 가고 싶다 하신 어머니의 이 세상 마지막
부탁을 들어 드릴 수 없이 가난하였던 학창시절 그 해 가을 나는 모든 것을
옆으로 밀어 놓고 홀로 세 남동생들과 사시는 아버지 곁으로 날아갔다.
한글 받침도 제대로 모른다고 동생들 한테 타박을 받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 곁으로 날아가 어머니 없는 삶을 살아가는 대학을 다니던 막내 동생과
군대를 다녀와 막 복학한 둘째와 직장을 막 잡아서 다니던 큰 동생과 더불어
아직은 은퇴 하시지 않은 외로운 아버지 곁을 지켜야만 하였었다. 새벽이면
일어나 연탄불을 갈고 지금은 호주에서 가정을 이루고 공인회계사로 살아가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둘째 동생과 번갈아 가며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연탄불을 갈아가며 서양에서 오래 살아온 문화와 습관대로 모든 가사일을
돌보아야만 하였다.
시장을 가고 아버지와 동생들 옷을 세탁하고 아버지 와이셔츠를 칼처럼
어깨까지 주름잡아 다려서 일주일 내내 갈아 입고 다니시게 걸어 놓고
아버지 월급을 타다가 봉투째 주시면 그 돈을 갖고 동생들 용돈 주고
살림을 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하였던 시절 두 동생들 대학 입학금을
부쳐주던 일 그리고 지금까지 매년 아버지 생신과 크리스마스면 용돈을
보내드리는 일들 오늘은 아버지 전화를 받고 모두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는 내 인생의 영원한 사표요 준엄하신 이 아들이 가장
존경하는 어른 가운데 한 분 이시다. 지금도 공중목욕탕을 가면 아들 등을
밀어주시는 아버지 누군가를 만나 어쩔 수 없어 술이라도 한잔 밖에서
마시고 들어오면 지금도 몸도 약한데 술을 마시고 다닌다고 야단치시는
아버지는 오늘날 타락한 말만 기독교인인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아닌
진정 언행과 모든 면에서 참 진실하시게 살아가시는 참된 기독교도로
감리교인이시다.
학생대표로 교직원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 이 시간에도 지독하게
강풍이 불어온다. 온 세상이 흔들린다. 아버지 전화를 받고 난 오늘은
왜 이렇게도 아버지가 그립고 보고 싶을까. 남들은 한 분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왔거나 살아가는 삶이라면 세 분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온
인생 이제 내게는 모국 서울에 계신 한국인 아버지와 캐나다 서부에
사시는 이방인 이신 아버지 파파가 계시다. 내가 늘 가슴에 새기면
기억하는 하나가 있다면 유년시절 은사님 이셨던 서울에 계신 아버지가
늘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의 그 한 마디가 일생을 두고 나를 어떤 시련과 역경 가운데서도
올곧게 나를 지켜준 힘이었다. 나를 믿으신다는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릴 수 없다는 생각 하나가 언제나 나를 오뚝이처럼 세워주는 힘이었다.
사랑하는 아버지 머지않아 곧 80이 되실 것이다.
인품이 높으신 아버지를 인생의 축복으로 주신 지극히 높으신 그분에게
매 순간마다 살아가면서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소년을 참사랑으로
일생을 두고 아들이란 이름으로 성인이 되어 중년이 되기까지 거두어 주신
그 거룩한 이름 우리 아버지………………영원히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아버지, 사랑해요. 당신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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