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Tchaikovsky - Symphony No.6 in B minor, Op.74 -"Pathetique"
바로 집 앞 길건너 포구
간밤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벅찬 새 학기 시작을 앞에 두어서 일까 밤새도록 뒤척이고 말았다.
감기가 아직도 싹 나아지지도 않고 오랜만에 은행을 가니 직원들도 모두다 감기를 앓고
주변에서 모두가 감기로 고생들을 하고 있다. 올 감기는 유난히 들어 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모국의 설날을 하루 앞두고 모국에서 이 메일이 하나 날아왔다.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그리워지나 보다. 아주 오래전 통신 초창기 천리안 하이텔과
유니텔이 중심을 이루던 시절 지금은 역 이민을 모국으로 가서 살고 있는 오랜 가족의
친구가 되는 분의 자녀인 아들이 한국을 알 겸 통신을 시작하여보라면서 처음으로
컴퓨러를 선물하여주고 인터넷을 연결하여 주어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유니텔에서 우리는 조우하게 되었다.
막 교직에서 은퇴하시는 분이 컴퓨러를 익힐 겸 소식을 주고 받을 친구를 부산에서
찾고 있었다. 그 사이에 다른 두 소중한 인연이 있게 되었다. 그중에 한 분은 글을
쓰시던 분이셨고 귀한 큰 아들을 명문대 법대생일 때 반정부 참여운동으로 불행하게
전국일간지에 회자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잃고 말았고 그 충격으로 근 10년이란
세월을 방황을 하고 있었던 때였다. 부산에서 은퇴하시고 지금은 거제시가 된
곳에서도 들어간 작은 섬 칠천도 바닷가 바로 앞 어촌에 땅을 사시고 집을 짓고
부산에서 이사를 가셔서 여생을 보내시고 계시게 되었다.
바로 그 어른이신 형님이 편지를 보내신 것이다.
참 정도 많으시고 멋도 있으시고 소박하시면서도 지고 지순하시기도 하신 분이시다.
백내장 수술로 거의 실명을 하실뻔 하셨고 철 지난 철에 회를 드셨다가 패혈증으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가시지를 않나 만고풍상을 다 겪으신 그동안 소식이 한동안
없으시다가 나 자신도 시간과 일상에 쫓기다 차일 피일 하다 소식을 드린다 드린다 하다
못 드리고 하기를 잠시 어느 날 한 통의 벼락 같은 메일이 날아왔다. 어찌된 영문인데
소식이 없느냐며 이대로는 절대로 인연의 끈을 놓을 수 없다 하시며 그야말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말았다.
곧바로 전화를 드리고 그동안의 사정을 말씀 드리니 안도의 숨을 내 쉬셨다.
어떻게 제가 우리의 인연을 망각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을 하니 궁금하고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하시는 것이 아니던가. 간밤 이 메일을 받고 곧 바로 회답을 하라고
하셔서 보내드리면서 내일 즉 설날인 오늘 전화를 드리겠다 말씀 드리고 학교를
저녁나절 갔다가 돌아오니 밤 10시반 이었다. 답장이 사진과 함께 도착하였다.
참 정도 많으시지 하고는 웃고 말았다. 잠시 후 전화를 드리니 반가워 하신다.
집 앞에 포구 - 거제시 하청면 칠천도 물안
그 특유의 허스키한 부산사투리가 수화기 저편 칠천도 물안 마을에서 흘러나온다.
니 사진 받았노 하신다. 서로 말을 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같이 부산 사투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답이 언제 한국 나올래 하신다. 요즘 정황상 꽁꽁 매어 있는
형편이라서 꼼짝을 못한다고 말씀 드리고 단 한 번도 동생이 형님을 잊은 적 없다
하니 그래 우리 소식 또 전하자 하시며 잘 있거레이 하신다.
수화기를 놓고 나니 무엇인가 자꾸만 마음을 괴롭히고 가로 키고 있다. 얼마나 소식을
기다라고 있을 까 싶었고 때론 얼마나 힘들어 하였을 까 헤아리며 간절함으로 주소를
인터넷 검색 창에 넣어 보았다. 안 뜬다. 전화번호를 넣어보니 뭔가 보인다. 아주 작은
사진이 어느 진보계열의 게시판 글의 상단에 올라와 있었다. 도저히 식별할 수 없이
작은 사진 어렴풋이 직감으로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그리움이 틀림 없었다. 그렇다면
갖고 있는 전화 번호는 틀림없이 통화가 가능한 것이 다는 결론이 섰다. 숨을 고르고
떨리는 마음과 가슴으로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고 있었다. 잠시 후
수화기를 드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저쪽에서 음성이 들린다.
순간의 반가움과 스쳐가는 수많은 상념들과 함께 저인데요 하니 아 그래 잘 있었어?
나도 잊지 않고 있었다. 전화 해주어서 고맙다. 그동안 나도 아파서 수없이 병원을
오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행여 암 투병을 하시고 계신가
하는 생각에 묻기가 두려웠다. 급성신우염으로 입원하고 수도 없이 아팠고 한쪽
눈도 실명했다. 잘못하면 소식도 서로 못 듣고 죽을 뻔 했다. 오늘이 그곳은 설날
이지요. 그래서 설날이라기에 문득 너무나도 사무치게 보고 싶고 그립기도 하고
연락이 닿지 못해 죄스럽기도 하고 하여 찾고 찾아 전화를 드리니 전화번호가
다행이 그대로네요. 내일도 전화를 할 수는 있지만 설날인 오늘 기억해 드림이
더 의미가 있다 생각하였지요. 고맙다.
내 목소리가 변하지 않았어?
왜요?
이제는 힘이 없어 전과 같이 아플 때는 걷지도 못했어….
행여 투석은 하시지 않겠지요…
아니다 괜찮다. 그리고 운전도 한다.
하니 한쪽 눈으로 어떻게요?
괜찮다 잘하고 있다.
네 목소리가 전과는 달리 힘이 약간 없으세요.
그렇다. 전과는 달리 힘이 없다.
나도 늙고 있다.
더는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씀 이외는 드릴 말씀이 없었다.
아니다 괜찮다. 나도 그동안 무척이나 아파서 병원에서 살았다.
저쪽 형님도 목이 메어 오고 있었다.
편지 하겠다는 말과 더불어 통화를 맞추고 나는 수화기를 손에 든 채로 복받치는
슬픔과 그리움에 형님의 모습을 되새기며 흐느껴 울고 말았다. 소식도 못 듣고
영원의 이별을 할뻔하였다는 말을 되새기며 생각하니 오늘 이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 모국의 설날에 나는 두 분의 형님들과 더불어 웃고 울고 말았다.
한 분은 건강이 오히려 좋아 지셨고 한 분은 병중에 계셨었고 요양을 하고
계시고 이 얄궂은 운명 앞에 서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을 뒤돌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참된 인연과 참된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절절한 그리움과 보고픔
그 자체다. 다만 묵묵히 가슴에 그리움을 묻고 살아 갈뿐이다. 더 열심히
살아가야 하며 더 열심히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다하여야 마땅하다.
그것이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3-4-1 악장 이어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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