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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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꽃 독백

붓꽃 독백 – 꽃은 피고

붓꽃 에스프리 2011. 9. 27. 16:02

 

 

 

죽도록 감기를 앓고 난 지난 두주 이제 겨우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뒤척이던 잠자리에서 일어나 디지털 신문을 열어보니 시선을 끄는 소식이 하나 있다.

장 뱅상 플라세 얼핏 들어보니 프랑스 사람의 이름이다.

 

 

 

   프랑스 상원의원 장 뱅상 플라세

   Jean Vincent Place

  사진출처 - Le Figaro

 

  첫 아시아계 프랑스 상원의원으로 그리고 한국인의 혈통을 갖은

  프랑스 정치가로서 프랑스 역사와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인물이다. 또한 환경운동가이자 경제전문가로서,....

 

 

맞다.

프랑스 상원의원에 당선된 프랑스 정치가의 이름이다.

거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다음이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는 사실이다.

그의 피부색은 노랑 동양인 하고도 한국인의 자손이란 사실이다.

 

7살에 서울 어느 고아원에서 프랑스 노르망디 명문가정 3 1녀가 있는 집안으로

입양되어 갔다. 아버지는 지역의 저명한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교사였던 그런 훌륭한

양부모님 밑에서 그는 성장하였고 학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잠시 회계사로 일반

직장에서 근무하였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란 그였지만 좌파 성향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는지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동안에 많은 활동을 하며

좌파 녹색운동에 뛰어 들었고 상원에 당선되기 전에도 프랑스 좌파 녹색당의

2인자였다.

 

어머니가 한국인 보모를 들여놓고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그가 20살 때 한국을

방문하라고 말씀을 하셨어도 그는 싫다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한국에 대한 모든

기억들을 송두리째로 잊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그가 녹색당의

2인자가 되고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가 그를 한국대사관 관저로 초청해 전통적인

한국 정찬을 맛을 보여준 후로 그는 한국 음식을 접하게 되었고 좋아 하게 되었으며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소식이 프랑스 주요일간지 르 휘가로에 실린 후 그 소식을 접한 누군가

두 번이나 그의 홰이스북으로 가족인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그는 친부모를

찾고 싶어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제서야 올해 한국을 프랑스 사절단으로 방문

할 때 기회가 되면 자신이 머물렀던 고아원도 들려보고 싶고 친부모도 찾아 보고

싶다고 하였다고 한다.

 

가족인 것 같다고 연락이 왔었다는 소식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무척이나 화가 났다.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그가 이름이라도 나니 부모라고 가족이라고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가 참을 수 없는 분노이며 경멸이란 생각이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정신적인 고통을 남모르게 동양인 소년으로 프랑스란 사회의 백인들 사회에서

성장하며 힘이 들었는지 알고도 남는다. 내가 그라면 친부모 아니라 더한 부모라도

결코 내 일생에는 만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길러준 양부모님이 피부색이 달라도

내 친부모란 생각으로 살아 갈 것이다. 나를 버린 부모를 이유가 어떻든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43세의 장 뱅상 플라세씨는 참 훌륭한 양부모님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국말을 잃어버릴 때 잊지 않도록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려고 그렇게

노력하였던 부모님들 이셨다니 그리고 이 한국인 양아들을 기르기 위하여 어머니가

교직을 포기하기 까지 하셨다니 그 사랑이 보통 사랑이 결코 아니다. 문득 80년대

중반기 내 생각이 났다.

 

내가 한국말을 잊어가고 받침도 잘 몰라 편지를 유년시절 은사님 이셧던 서울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편지를 간신히 써서 보내면 동생들이 한글도 제대로

모른다고 매일 야단치던 일 한국을 가서 어린 시절 죽마고우를 만나서도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없었던 일들 나도 플라세씨 같았다.

 

철저히 내 모든 기억에서 한국의 모든 삶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면서도 한국 학생들이라도 있어서 만나게 되면 관계를 설정하지 않았었다.

그저 싫었다. 철저하게 영어권에서만 살아가고 있었고 한국은 나에게는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나라였었다.

 

나는 누구인가로 무척이나 방황하였었다. 너무나도 아픈 시절이었고 너무나도

외롭고 처절한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파파는 나를 한국인들만

만나시면 끌고가 인사를 시키시곤 하셨었다. 죽기 보다 나는 그것이 싫었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인과 관계설정이나 사회생활을 나는 문화적인 가치 차이로

예전 보다는 많이 나아졌어도 잘 못한다.

 

얼마를 지났을까 우리는 같이 크리스마스 다음날 박싱 데이에 샤핑을 함께

갔다. 그러나 샤핑 몰이 아직도 열려 있지 않아서 주변에 있는 작은 체인점에

커피를 마시러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가면서 누구나 처럼 보통 때 처럼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그 순간 난데없이 우리 파파는 생전처음으로 이 아들이 본적이

없는 소리를 버럭 지르시면서 내 허리춤을 잡아 끌고 영하 20도도 넘는 엄동설한

밖으로 나오라면서 끌고 나가셨다.

 

막 야단을 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마구 영어로 쏼라 대며 대들었다.

아빠, 내가 영어한다고 한국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니고 내가 영어하는 나라에서

자랐는데 영어로 인사를 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야요?”

 

뭐라고? 너 알지 네가 중국아이면 중국 말 하는 거구 너는 한국 아이니까

한국말을 하여야 한다는 것 말이야 그런데 왜 영어로 그 주인에게 영어로 인사해

………그 사람 한국사람이야…………알아…………따라 들어와 그리고 다시

한국말로 인사해 알았지? 그리고 파파를 따라 들어가면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니 그 주인이 놀라면서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오는 것이 아닌가.

 

. 한국 사람이야요.. 그럼 이 사람은 누구니? 우리 아버지요. 그런데

왜 얼굴이 다르니양부 이시고 중국계 야요. 저는 아버지의 양아들 이고요.

아 그러니 너의 아버지 참 좋은 분이셔 아주 점잖으시고 신사이시고 가끔 여기

들리신단다. 나는 캐나다 이민 온지 14년 되었어. 토론토 살다가 이곳 캘거리로

이사 왔단다. 너 어디 사니? 저요? 지금은 미국 캘리훠니어에서 살고 학교를

다녀요”

 

그리고 우리는 다시 그 가계를 나와 샤핑을 하며 겨울 잠바를 사고 집으로

해가 기울어 어둠이 내릴 때 돌아왔다. 파파는 운전을 하시고 화가 난 나는

입을 다물고 그저 죽음 같은 고요만이 차 안에서 흘렀다. 얼마를 왔을까

나는 파파에게 잘못했다고 말씀 드리고 앞으로 한국어를 더 공부하겠노라고

약속을 하였다.그후 나는 제일 먼저 샘터를 읽기 시작하였었다.

 

그리고 얼마의 세월이 흐른 후 온라인에서 아버지 같으신 할아버지를 귀한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고 추운 겨울날 할아버지는 오랜 투병 끝에 간암으로

돌아 가시고 할아버지의 자녀분들과 못다한 인연의 정을 이어가고 그분들의

큰 배려와 사랑으로 모국을 방문하고 남도를 찾아가 한국적인 문화체험을

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생가에도 들리고 가없는 사랑과 배려로 한국을

다시 가슴에 끌어 안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을 좀더

긍정적으로 바라 볼 수 있었고 나의 정체성을 정리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후 세월이 흘러 나는 다시 부활절에 파파를 찾아가게 되었고 우리는 함께

다시 롹키 마운틴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가는 동안 나는 파파에게 지난

세월의 박싱 데이의 에피소드를 다시 대화에 끌어 내어 깊은 감사를 표 할

수 있었다. 파파의 매섭고 준엄한 꾸중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지금처럼

한국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는 없었다. 비록 영어가

나의 일상 언어일지라도 지금은 오히려 영어가 많이 퇴보되어 다시 많은

독서를 하고 있다. 프랑스 상원의원에 당선된 장 뱅상 플라세씨의 부모님은

아마도 우리 파파와 같은 사랑이 깊으신 분들 인가 보다.

 

유달리 플라세씨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리운 우리 파파 시험이나 모레 끝나면 오랜만에 전화도 드리고 사랑을

가득 담아서 편지를 써야겠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학부 때는 쓰던 편지

아버지도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팔순이 넘으시고 나 또한

중늙은이가 되고 보니 일년에 두 세 번 편지 쓰기가 어렵다.

 

피는 물 보다 진하다는 한국 사람들이 하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 사람이다.

물이 피보다 진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것은 숭고한 인간적인 사랑이란 것이다. 숭고한 휴머니즘

가득한 사랑은 국경과 피부색과 모든 것을 극복 가능하다.

 

 

 

 

끝으로 먼 이역에서 아름다운 꽃 한 송이 피워낸 한국이 낳은 프랑스 상원의원

장 뱅상 플라세씨에게 마음의 장미 꽃 한 송이를 한국인이란 혈통을 같이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대서양을 건너서 바치고 싶다. 

 

 

 

장 뱅상 플라세 프랑스 상원의원은 환경문제에서는 가장 주목 받는 프랑스 정치인 중에 한 사람으로

각종 언론매체의 인터뷰는 물론하고 프랑스 주요 티비 방송 인터뷰에 자주 초청되는 인물이다.

 

내년에 만에 하나 대선에서 좌파가 승리한다면 차기 프랑스 재무장관직을 넘보고 있는 인물로서

대단히 주목 받는 인물이다.  밀고 나가는 힘이 대단한 정치가라고 평가받고 있다.

 

 

  올해 38세의 독일 연방공화국 부수상이된 월남

  사이공에서 1973년에 출생한 고아로 독일에 입양

  되었던 Philipp Rösler씨

 

 

우연히 장 뱅상 플라세씨에 대한 기사가 중국의 어느 영어 싸이트에 올라가 있어 글을 읽다보니

그밑에 댓글에 이런 글이 올라 왔다. 독일에 필립 뢰슬러 연방 부수상을 아느냐고? 그는 비엣남

태생의 독일에 입양된 고아로 독일 부수상이 된 38세의 의학박사라고 아니 이건 또 뭔소리야 하고

찾아 보니 그는 생후 9개월 되던 해에 이미 자녀가 둘이나 있는 독일 가정으로 입양되어 갔다.

 

그리고 합부르크와 다른 두 도시를 부모님 따라 옮겨 다니면서 성장하고 2002년에 하노버 의대를

졸업하고 독일 연방군의관으로 근무 하게 되었고 제대후 정치여정에 올라 현재 지난 5월 선거에서

부수상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다. 버려진 생명 그러나 한 송이 꽃을

피워 세상에 빛이 된 국경과 인종과 국적을 초월한 이 눈물겨운 인간승리와 인류애의 승리의

월계관들 찬란하다....

 

 

 

Philipp Rösler씨는 현재 최연소자로서 독일 자유민주당 당수이자 연방정부 부수상이며

또한 안과의사이며 그의 아버지처럼 독일 육군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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