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노래하지 않으려고 했다. 남루해진 꿈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힘에 이끌려 대중 앞에 섰다. 더벅머리에 허름한 점퍼를 입은 작은
체구의 청년은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 ‘네순도르마’(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렀다. 처연한 그의 음색에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지난해 12월 SBS TV ‘스타킹’에 출연한 후 성악가의 꿈을 이룬 김승일(34)씨.
그는 그렇게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7년 동안 수원에서 야식배달을 하던
그의 이야기는 꿈을 잃어버리고 사는 대중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다음 달이면 제가 세상 밖으로 나온 지 1년이 돼요. 친구들은 5년은 지난 것
같다고 그래요. 저도 그렇게 느껴져요. 아마도 그건 그동안 제게 감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인 것 같아요.”
지난 1년 동안 그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전쟁 같던 지난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성악가의 꿈에 한 발짝씩 다가갔다. 4월 경기도 문화의 전당에서
‘내 생애 첫 번째 공연’을 열었다. 예매 3일 만에 2000석 가까운 전 좌석이
매진됐다. 5월엔 그와 곧잘 비교되던 폴 포츠와 함께 무대에 섰다. 제헌절엔
국회에서 애국가를 불렀고 최근엔 대한적십자사 홍보대사가 됐다. 외모도
달라졌다. 세련된 어린왕자 헤어스타일과 깔끔한 감색 콤비를 입었다.
그는 희망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길 원한다. ‘잃어버린 나’를
찾은 그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노래는 나의 힘
중학교 시절, 친구들이랑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며 노래를 불렀다.
오르막길엔 아랫배에 힘을 주고 페달을 힘껏 밟으며 고음을 냈다. 힘을
줄수록, 페달을 힘껏 밟을수록 고음은 높아졌다. 노래를 부를 때 행복했다.
수원시 가요제, 서울시 청소년 가요제, 안양시 가요제, 오산시 가요제에서
대상을 휩쓸었다. 이어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뽐내기 대회’에서
연말대상을 수상하면서 막연히 ‘노래가 내 인생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1994년에 경기도 청소년 성악경연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했지만 클래식보다는
대중음악이 좋았어요. 당시 서태지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을 때였지요.
가요제에서 노래를 부르며 수천명의 환호를 받은 경험 때문인지 제한된
공간에서만 연주되는 성악은 왠지 권위적인 것 같고 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그가 성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르는
‘카루소(Caruso)’를 듣고 나서였다. “음악을 듣는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어요. 노래에 담긴 희로애락의 감성에 머릿속이 멍해지는 듯했어요.
이후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듣고 부르게 됐어요. 노래를 부를 때 가슴속
이야기를 풀어놓는 듯 후련해질 때도 있었지요.” 멜로디는 힘이 되었다.
봉인된 꿈
96년 한양대 성악과에 합격했다. 막연한 음악에 대한 꿈을 구체화시킬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였다. 아들이 노래하는 것을 좋아해
학비 마련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그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어머니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는데 세상이 끝나는 것
같았죠. 나 때문이란 생각에 학교를 그만두고 앞으로 노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절대로 노래하지 않으리라.’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컸다. 음악은
가까이 할 수 없는 ‘판도라 상자’ 같은 것이었다. 음악에 대한 꿈은
대학 1년을 끝으로 마음속 깊숙이 봉인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노래를 좋아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다니던 교회에도 발길을 끊었다. 성가대를 보면 노래하고 싶어질까
두려웠다.
그는 돈 때문에 맺힌 한을 풀기라도 하듯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새벽 1시까지 일했다. 택배, 퀵서비스, 노점상,
유흥업소 전단지 배부 등 돈 벌 수 있는 일은 다했다. 그렇게
수천만원을 모았다. 그러나 친구에게 사업자금으로 빌려줬다 떼였다.
교통사고도 연거푸 났다. 스스로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싶었다.
3년을 그렇게 보냈다. 자살결심도 세 번이나 했다.
“자고나면 빚이 늘어나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느껴질 때,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라고 느껴질 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조금씩 환경을 돌려놓는 힘이 있었어요.
전 성령님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잊고 살았지만 주님은 저를 잊지 않고
줄곧 지켜보고 계셨던 거지요.”
야식집 사장을 꿈꾸며
야식집은 추운 겨울이 더 바빴다. 27세 때부터 7년 동안 경기도 수원시
매교동 ‘수원야식’에서 배달을 했다. 돈을 모아 야식집 사장이 되겠다는
소박한 꿈도 품었다. 홀로 있을 때 노래로 삶의 고단함을 덜어냈다.
우연히 휴대전화에 녹음한 노래를 들은 사장이 ‘스타킹’에 출연 신청을
했다. 그래도 나가지 않으려 했지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방송출연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방송이 나간 후 시청자 게시판에
130쪽이 넘은 댓글이 달리고 격려 전화도 많이 받았다. 일약 스타가
됐지만 그는 묵묵히 지난여름까지 야식배달을 계속했다. 무대에 올라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면 행복했고, 많은 사람들의 환호가 감사했지만,
방송 후 잠시 동안의 관심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니홈피엔 그의 노래를 듣고 희망이 생겼다는 사람들의
메시지들이 이어졌다. 뇌경색으로 몸져누운 어떤 분은 “당신의 노래를
듣고 삶의 희망을 찾았다”고 했다. 한 암 환우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
아 치료를 포기했었는데 당신이 성공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서
치료받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저만을 위해 살았는데 이제 저의 노래가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고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래서
야식배달일은 그만두고 음악공부에 매진하려고 해요. 내년에 한양대
성악과 2학년에 복학해 못 다한 학업을 계속할 겁니다. ‘띠 동갑’ 동생들과
같이 공부할 생각에 설렘 반, 긴장 반입니다.” 오랫동안 봉인된 꿈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음악과 함께 찾은 신앙
그는 가장 기억에 남은 순간으로 ‘내 생애 첫 번째 공연’을 꼽았다. 무대에
서기 전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 당신이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노래를 시작하게 한 것도, 노래를 그만두게 한 것도 어머니니까 긴장하지
않게 도와주세요. 절대로 울지 않고 프로답게 할게요.’ 울지 않겠다고 몇 번을
다짐했지만 첫 곡을 시작도 하기 전 가슴이 타는 듯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에 ‘세상은 참 따뜻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 많이 조르셨을 것 같아요. ‘우리 승일이
좀 도와주세요’ 그랬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어려운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젠 교회에 다시 나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기회가
된다면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는 복음성가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좋아한다.
요즘 그는 교회 초청으로 무대에 서게 되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생각에
기쁘다고 했다.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생각도 긍정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예전엔 ‘내가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먼저 했는데 이젠 ‘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된다고 하잖아요. 간절히
원하고 간절히 바란다면 희망은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니까요.”
희망의 대장정을 꿈꾸며
그에게 소망을 물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심장병 어린이와 어려운
이웃을 돕는 ‘희망대장정 콘서트’를 열고 싶다고 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랑만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저에게 노래는 희망입니다. 꿈을 이루지 못한 분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그는 무대에 서기 전 ‘제 노래가 희망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는 2012년 2월(12, 14일), 5월(19, 20일) 서울 삼성동 올림푸스홀에서
‘테너 김승일 독창회 초대’를 연다. 클래식, 가곡, 영화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통해 용기와 희망의 이야기를 건넨다. 그는 이제 ‘꿈을
꾸는 자’에서 ‘꿈을 주는 자’가 됐다.
글 이지현 기자·사진 홍해인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