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고 나
순수한 영혼의 사색과 사랑 그 영원한 삶의 에스프리

붓꽃 독백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날

붓꽃 에스프리 2023. 3. 30. 04:52

길고도 긴 비와 흐림과 강풍이 끝나고 어저께 오늘 이틀 동안 날이 개 눈이 부시게 찬란한 햇살이 봄을 알려주는

것만 같은 날씨다. 어저께 퇴근하니 연방정부 사회보장국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열어보니 은퇴 연금(한국의

기초연금) 마지막 단계 3단계 마무리를 위해서 필요하니 우리 지방 사회보장국 정해준 나타샤란 담당자에게

전화를 10일 내로 하라는 내용이었다. 보이스 메일에 전화번호와 이름을 남겨 놓았다.

하루가 지난 오늘 아침에 2차로 보이스 메일에 다시 메시지를 남겼지만 오후가 되도록 연락이 오지를 않았다.

느낌이 이러다가는 생전 전화가 올 것 같지 않아 사회보장국에 방문 예약을 위해 전화를 걸어놓고 담당자가

나오기를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다. 먼저도 은퇴 시 건강보험에 관한 것을 물어보기 위해 한 시간을 기다린

일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50분이 되어서 간신히 베벌리란 여성 직원과 통화가 되었다.

사연을 이야기하니 기다리라고 몇 번을 하더니 나를 담당한 직원 나타샤란 사람이 현재 자리에 없는 데 그녀와

통화를 했는데 10분 내로 전화를 할 테니 전화번호를 달라 하여 지금 통화하는 이 전화가 모바일 전화이니 이리로

하면 된다고 하고 끊고 나니 곧바로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은퇴연금 신청자 확인 절차였다. 생년월일, 출생지,

작고 하신 어머님의 결혼 전 성씨와 다른 이름을 사용한 적이 있는지 연방정부 의료보험 카드 A는 언제 발부

되었는지를 묻는 과정이었다.

마지막으로 소급하여 지난해 8월부터 은퇴연금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생일 달 지난 2월부터 시작해 이달 3월부터

지급하기를 원하느냐고 물어 왔다. 지난달 신청할 때 신청서에 한 가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그 부분을 묻는 것이었다. 왜 소급해서 지난해 8월부터 지급을 신청할 수 있는지는 모르나 그렇게 되면 한화로

2천만 원이 넘는 목돈을 일시불로 지급하는 대신 남은 인생 매월 받게 되는 은퇴연금 수령액이 한화로 10만원이

넘게 차이가 나게 된다고 한다.

하여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니 대신 매달 받는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최고치로 받을 테니 소급하여 받는 2천만 원

넘는 수령액은 거절하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사무적인 것을 모두 맞추고 다행히 일은 끝났다. 시간이 허락될 때

맞추지 않으면 현재도 직장 근무를 하는 입장이라 일을 맞출 수가 없다. 비로소 긴장의 끈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가 바친 세금 타먹기도 힘들다 하는 심정이었다. 피로감이 밀려왔다.

부엌에 들어가 물에 불린 녹두전을 만들기 위한 녹두를 갈아 놓았다. 그리고 묵은지 썰고 숙주 세척해 물 빼고 다른

재료는 마켓 가기 싫어 있는 것만 넣고 옆으로 밀어놓고 일단 잠자리에 들었다. 그럴 이유는 온종일 네이버가 불통이

되어 일기장 같은 내 블로그를 들어갈 수도 없고 온종일 은퇴연금 마무리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 하며 자고 싶었다.

눈을 뜨고 나니 지금 밤 10시가 되었다. 다행히 열어보니 네이버가 로그인이 가능해졌다.

잠시 유튜브를 열어보니 미네소타 중북부 추운 지방하고도 스팸 본사가 있는 곳에서 사는 백인 부부가 한국으로 시집을

간 딸과 한국인 사위와 함께 한국 영화를 보면서 감정이입이 되어 눈물을 쏟고 있었다. 뭔가 하고 보니 <Ode to My

Father(2014)/국제시장>이란 영화를 보고 있었다. 6.25 동난 이란 한국전쟁 그 민족의 비극을 그린 영화였다.

물론 나는 아직 보질 못했다. 그러나 전후의 피폐하고 헐벗고 굶주렸던 우리 어린 시절의 처참한 기억들 진달래꽃을

따먹고 먹을 것이 없어 칙 뿌리를 캐먹던 아이들 집이 없어 산 밑 땅굴에 가마때기 하나 대문으로 처놓고 살던 사람들과

이산가족 찾기를 하며 울부짖던 티브이 화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생각만으로도 울컥해지는 느낌이며 천상에 계신

모님들과 오늘의 나를 있게 해주신 양부 후레드며 아빠 헨리까지 그 기구한 세월들이 감당키 어려운 그리움으로

이 한밤 가슴을 파고든다.

 

유튜브에서 김재중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의 성장과정 이야기가 눈에 띄어 찾아보니 나는 모르는

그러나 k pop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면 기억하는 그 유명한 동방신기 그룹 멤버였던 김재중의 이야기였다.

그가 어려서 부모는 이혼을 하고 생모는 재혼을 하였고 그는 버려져 딸만 8명을 둔 어느 김 씨 가문에

입양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유복하게 양부모님 과 누나들과 성장했다. 길러주신 부모님은 그가 연예인이

되는 것을 처음에는 반대하셨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성공해 길러준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마음으로 땅을 사고 집을 건축해 살게 해드렸다는 이야기부터

그리고 나중에 생모가 나타나 그가 갈등 속에서 결국은 양부의 성 김 씨 성을 택하였다는 것까지 가슴이 시렸다. 

순간 문득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노래가 가슴 저 밑에서부터 들려 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금 자판기를 두드리며 문주란과 알리가 불러주는 것을 듣고 있다. 그리움이 밀려오면 캐나다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낯선 미국의 작은 시골 비행장 백인들 속에서 홀로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다 다시 트랩에 올라 나를

그토록 사랑해 주셨던 우리 파파 후레드에게 날아가던 지난 어린 시절이 오우버랩 되어 이 한밤 나는 못다 한

그리움에 뜨거운 눈물을 쏟고 훔치고 말았다.

어찌 내가 우리 아버지 파파 후레드를 살아생전에 잊을 수가 있으랴 싶다. 이 밤은 의도치 않게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에 꽂혀 이곡을 부른 모든 한국 가수들의 노래를 지금 듣고 있다. 그러다 만난 윤복희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듣고 있다. 이 여인만큼 기구한 삶을 산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내가 처음으로 한국인

학생들을 만났던 학부 3학년 때 초이(최)란 성을 갖고 있던 기숙사 룸메이트가 카세트 테이프를 녹음해다 준 곡

가운데 윤복희 씨가 부른 <여러분>이 있었다. 나는 늘 한국 문화의 언저리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늘 뱅뱅 돌고 있었다. <여러분> 이 노래만큼 가슴을 파고드는 노래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 후레드는 방학이 되어 내가 집에만 가면 그 추운 캐나다 날씨 영하 30도 40도에 샤핑 몰로 데리고

가서 지갑이나 옷을 사주시면서 늘 한국인을 만나면 가서 인사하라고 시키시곤 했었다. 나는 그것이 그때는

제일 싫었었다. 그러나 엄하시면서도 자상하신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나는 후일에 철이 들어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후일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이렇게 한글 자판기를 두드릴 수 있는 것도 다 천상에 계신 아버지 후레드의 은덕의 결과다.

 

산다는 것이 결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일이다. 내가 정체성에 방황을 하고 헤매던

지난날 고속도로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아버지 후레드 가슴을 산산조각 

낸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한없이 아버지 영전 앞에 용서를 빌고 또 빌고 싶은 심정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90세로

작고 하시기 전까지도 끈을 놓지 않으시고 다 큰 아들을 지극 정성으로 사랑해 주셨었다.

한국인들로부터 받은 상처만 지금도 생각이 날뿐이다. 가난한 학생이라고 문전 박대하던 사람부터 벼룩이 간을

빼먹는 다고 캐나다가 아닌 미국에서 고학을 하며 학창 시절을 보내던 때 그 당시 천오백 불을 때어먹고 간 사람 

부터 그러면서 나는 백인들 속에서 성장하고 학창 시절을 보냈고 살았었다. 어려서 그들은 나를 중국놈 일본놈이라고

부르며 놀리곤 했었다. 그러면 나는 강해져야만 했고 그렇게 형성된 강한 성격인 나는 죽인다고 쫓아가기도 하다

교정에 경찰로부터 제지 당하고 혼나기도 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살아남아야 했기에 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직장에서 그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 불의를 보면 나는 절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참지 못한다.

그리고 다까 세우고 만다.

그러다 서투르면 대뜸 나는 쌍 시웃 부터 내뱉는다. 그렇다고 매 순간 그러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 역시 이지와 지성을

아끼는 사람이기에 어찌 예의 범절을 모르랴 그리고 지킬 줄 모르랴. 그럼에도 거친 세파의 지난날 내가 경험한 인생

여정이 나를 가르친 것은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업무처리든 뭐든 한국인의 기질대로 똑 부러지고

깔끔하고 완결되게 뭐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 혈육이 있다면 지금 나는 어땠을까 생각도 해볼 때가 가끔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 부서에는 왼만 하면 아무리 어린 직원이라도 각자 자기의 인생 스토리가 있다. 할머니와 엄마 가족의

부양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부터 남편과 이혼하고 외아들을 친정 엄마와 같이 양육하는 젊은 엄마부터 그런데 이혼한

아빠는 이제 50대 중반을 넘었는데 얼마 전 전립선암 수술을 받았고 동생은 더 기구한 병과 투병을 하고 있어 금발의

백인인 에린은 한주 건너 비행기 트랩에 올라야만 한다.

책으로 출간을 해도 수십 권 수백 권이 되고도 남을 참 기구한 인생의 절절한 이야기들 그럼에도 그 시련과 역경을

이기고 당당히 살아가는 모습들 하여 에린을 만나면 안타까움에 요즘 잘 지내라고 한마디라도 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좀 한가하면 바넬라 향 가득한 원두커피 갈아 한 잔씩 동료 직원들 커피 챙겨주는 것도 내가 하는 일이다. 

내가 휴무하는 날은 커피는 없는 날이다. 늙으니 사용하지 않는 모국어를 상실해 기억을 못 할 때가 가장 속 터지고 

답답하다. 영어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사용하지 않는 어휘는 상실하게 된다. 늙는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보다.

기억력이 쇠퇴하고 체력도 딸리고 원숙해지는 맛도 있다면 허무함도 동반하고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고독과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지혜도 필요한 것이 늙음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어느 사이에 내가 노인네가 되어 은퇴 연금 수령을 하는 나이가 되었나 싶다. 그렇다는 사실 자체가 먼저

길을 떠나신 우리 아버지 후레드가 내 나이이셨을 때를 생각하게 된다. 70세의 사람이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한국어가 아닌 영어가 일상 언어라고 생각하고 그 위에 한국을 대입하면 그림이 안 그려진다.

결국 나는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지난해 대 히트 친 드라마 파친코가 스쳐간다. 한국의

한적한 어느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목놓아 마음껏 뜨거운 눈물을 쏟아보고 싶다. 그리고 독도를 방문해

나는 누구인지 나를 재확인해 보고 싶다. 내가 정신적으로 방황할 때 우리 아버지 후레드는 늘 그러셨다.

너는 한국 사람이기에 한국말을 해야 한다고 그래서일까 1985년 12월  26일 박싱 데이에 샤핑 몰(샤핑 센터)이

아직 열리지 않아 근처 편이점에 들어가 따듯한 커피라도 한잔 마시자고 하시며 발을 내디디며 나는 영어로

인사를 했었다. 그 순간 내 평생 처음 본 우리 아버지 화 내시는 모습으로 내 허리춤을 끌고 밖으로 잡아끌어내시곤

대 호통을 치셨었다. 주인이 한국 사람인데 왜 영어로 말을 하냐며 철없는 나는 항변을 했었다. 아빠 그렇다고

내가 한국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네기 중국 사람이면 중국어를 해야 하고 한국 사람이면 한국말

해야 되는 데 왜 영어를 하냐며 결국 아버지는 나를 다시 끌고 들어가셨다.

나는 다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하고 말을 하니 너 한국 사람이니 물어보시며 이 사람은

누구니 물었다. 우리 아버지이세요. 왜 그런데 얼굴이 다르니 물었다....... 지금은 눈물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런 아버지 후레드가 그립다.

아버지,

아버지의 한국인 아들은 곧 내년에 아빠처럼 은퇴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신 대로

아버지가 실망하시지 않을 정도의 삶을 살아내고 있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일랑은 마셔요. 먼 훗날 아버지 천상에서

다시 뵈어도 저는 영원히 아버지 아들입니다.

어이없는 것인지 기가 찬 것인지 이 글을 업로드하고 나니 내 귓가에 뭔 소리가 나기에 앞에 잔디밭에 스프링클러가

망가졌나 했다. 그런데 이 새벽에 차 한 대가 지나가는 소리가 나는 데 이거 뭐야 비에 젖은 바퀴 소리가 들려와 창밖을

내다보니 비가 내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 새벽 3시 44분이다. 날이 개어 좋다 했더니 그게 아니다. 다시 비가 중단되고

날이 개어 오후 한시 눈부신 햇살이 부엌 창가에 들어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도 맑음도 있고 흐림도 있고 강풍도

있는 것이 정한 이치라 생각한다.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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