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고 나
순수한 영혼의 사색과 사랑 그 영원한 삶의 에스프리

붓꽃 독백

하얀 밤에서 시작해 하얀 밤에

붓꽃 에스프리 2024. 4. 13. 03:56

황량한 극동 러시아 사할린 제주인 집성촌이 있는 마카로프 해변가

 

지난 한 주 근무를 맞추고 돌아와 너무나도 피곤해 첫날 월요일은 샤워 후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온종일

잠만 잤다. 전과 달리 늙어가니 젊어서와 달리 체력이 달림을 피부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느끼게 된다. 아직도

남들은 흰머리가 거의 없는 나를 보고 만 칠십 하나라고 하면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거야 누구나 하는 말이겠지

하는 마음이다.

지난주 치과 사무실로부터 정기 검진 때가 되었다고 연락이 와서 예약을 하고 어저께 낮 12시에 사무실을 방문해

자상하고 친절하신 내 성격에 딱 맞는 치과의사 선생님의 진료를 받게 되었다.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방문해 치석

제거를 하고 동시에 상한 부분이 있으면 치료받고 다음으로 매년 심장 초음파 검사를 한 번씩 정기적으로 하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다. 단 음식을 먹지 않고 살고 설탕 자체가 집에 없으니 내 나이에 그래도 단 하나도 치아를 뽑은 일도

없고 틀니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치과 사무실을 가기 전 집을 나서는 데 어찌나 바깥이 덥던지 초여름 같았다. 치과 진료를 맞추고 6월 말 은퇴 후

8월에 오면 그때 다른 상한 부분을 치료하자고 하여서 그러마 했다. 나는 주치의나 심장전문의나 치과의사가

충고하거나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이 최선이란 것을 그 누구보다 피부로 알고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 고집대로 멋대로 의사들이 하지 말라거나 먹지 말라는 것을 어기는 사람들의 말로는

하나같이 중병하고 살거나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눈으로 수도 없이 목격하고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생과 삶의 필연으로 늙어가면 죽음에 가까이 가는 나이가 되어 갈수록 남녀 누구나 막론하고 좀 더 건강하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서는 철저한 절제와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논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진료를

맞추고 다음으로 들린 곳이 대형 잡화 체인 상점 안에 있는 약국이었다. 지난달 새로 처방해 준 이제는 제대로

혈압을 조절해 주는 혈압약 두 개가 바닥이 나 다시 한 달 치를 채워 달라고 이야기를 하러 가야 했다. 미국의 경우

대부분은 주치의가 3개월치 처방전을 내준다. 하여 매달 채우러 약국을 가야 한다.

그런데 여름처럼 더워 에어컨을 켜고 운전을 하며 도착한 약국이 있는 체인 소토어가 문을 닫는다고 경고문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니던가. 순간 그럼 다음은 어느 체인 스토어 약국을 가야 하지 하는 생각이 앞섰다. 들어가니 약국에 약을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나르느라 난리 법석이었다. 여성 근무자에게 약이 떨어져 필요한데 채워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

컴퓨터를 두드리더니 잠시 의자에 앉아 기다리라고 한다.

잠시 앉아 있다 불현듯이 심장약이 떠올라 카운터로 가서 이약도 가능한지 보아달라 하니 약이 있는지 먼저 확인을

해야 한다고 하더니 된다고 앉아 있으라고 했다. 얼마 있으니 이름을 불러 약을 받아 갖고 발길을 돌렸다. 4월 18일

이후에는 건너편에 내가 다니는 미국 그로서리 스토어 즉 이마트 같은 식료품 전문 대형 스토어 안에 있는 약국으로

가면 된다고 한다. 그곳으로 모든 자료를 넘겨주었다고 말을 한다. 내가 이용하는 은행 지점도 그 안에 있는 곳이라

아주 잘 되었다 싶었다.

길 건너 스토어로 차를 몰고 가서 주차하고 바게트 빵 두 개와 랙토스가 없는 우유 1갤런짜리 하나 사 갖고 셀프서비스

카운터에서 빵과 우유 스캔하고 나왔다. 다음은 2마일 정도 되는 안경점으로 갔다. 집에서 사용하는 안경 두 개 중

하나가 스크루가 느슨해져 헐렁거려 나사를 조여달라고 해야 되고 하나는 직장에서 사용하는 안경인데 몇 년 괜찮더니

갑자기 지난 월요일 오른쪽 귀 중간 바로 위를 눌러 얼마나 아프던지 피부가 터지는 줄 알았다.

                                               세계적인 3대 미항 샌프란시스코

호주에 시드니와 하버 브리지 다리가 있다면

미국에는 미항 샌프란시스코와 골든 게이트 브리지 금문교가 있다

한국말 "가는 날이 장날이다"가 발생했다. 문이 잠겨 있고 문 앞에 떡하니 점심시간이라 2시에 문을 열겠다는

문구였다. 아직도 45분이 남았고 밖은 초여름처럼 말도 못 하게 덥고 결국 홍콩 반점이란 식당이 있던 곳부터

세 자매란 상호를 달고 김치를 판매하는 곳부터 서 네 번 돌다 안경점 앞에서 결국 기다리게 되었다. 아이의

소개로 몇 년을 다니게 된 한국인 주인과 한국인 종업원들이 근무하는 아주 큰 안경점이다.

그런데 70 중반이나 80 초반은 되었을 듯한 한국인 여성이 문에 몇 시에 연다고 사인도 부쳐놓지도 않고 전화도

해주지도 않고 그랬다며 불평을 시작했다. 순간 나는 손으로 영어로 써서 부쳐놓은 것을 가리키며 저기에 2시에

연다고 했는데요 하니 이 여인이 되받아치며 문에 없잖아요 하며 언성을 높이기에 대꾸를 하지 않고 그대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속으로 지저스 하며 이 여자 보통내기 넘네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겠다 하였다. 그랬더니

그 옆에 기다리고 있던 60대나 70대 초반이나 되었을 또 다른 한국 여인이 영어로 뭐라고 한마디 한다.

결국 얼마 있으니 5분 전이라고 한국어로 떠들더니 안경점 직원들이 점심 식사를 하고 몰려들 왔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다들내가 제일 먼저 온 사람인데 나는 그저 안경 두 개를 들고 서서

기다리니 주인 딸처럼 보이는 영어가 유창한 40 중반 정도 된 여성이 사무실에서 나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냐고

하기에 그녀와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안경 1번은 느슨해진 안경다리 나사 좀 조여주고 안경 2번은 귀 바로 위

살을 눌러 아프니 그것을 조절해 달라고 하니 알았다며 의자에 앉으라고 해서 앉아 기다리니 본인이 직접 조정하고

안경을 깨끗이 닦아 갖다주었다.

한참이 지나서 조정이 된 안경을 써보라며 키가 작은 착하게 생긴 50 중반이나 60대 초반 정도 된 남성 직원이

다가왔다. 잘 맞는다고 말을 하고는 몇 주 만에 처음으로 당신과 한국말을 한다고 하니 한국말을 같이 하니 좋지

않냐고 한다. 때론 한국어 어휘를 생각 못 해 영어를 섞어 이야기하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이

호칭이다. 영어를 사용할 때와 달리 한국어를 사용할 때는 상대방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가 가장 고민스럽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마켓을 들려 지난해 같으면 한단에 총각무 4개 달린 것 하나에 1불 하던 것이 요즘은

1불 64 전이다. 결국 640원이 오른 것이다. 그런데 그 총각무의 크기는 한국 총각무 크기의 반 토막이다. 토양이

달라서인지 한국같이 쭈욱 잘빠진 길이의 총각무는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다. 3단을 사 갖고 돌아와 더워 땀이 나

반바지 차림으로 무를 다듬고 잘라 소금에 절이고 샤워하고 너무 피곤해 다시 잠자리에 들어 눈을 떠보니 저녁

7시가 되었다.

이러다 또 귀찮아 내일로 미루게 되고 결국 총각무는 짜게 절여지겠다 싶어 부엌으로 들어가 세척하고 블렌더를

꺼내 양파, 마늘, 새우젓, 사과를 넣고 갈아 준비를 했다. 생각하니 생강을 지난번 풋배추 때도 그랬고 요즘 김치를

담그며 까먹고 안 넣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찹쌀 풀 쑤고 버무려 작은 병 1개 반을 반년도 넘어 처음으로 총각

김치를 담갔다.

간밤 우연히 이태리 셰프들이 <한국은 처음이지> 프로에서 한국 치킨 세 가지를 시식하던 중 그중에 한 셰프가

총각김치를 손에 들고 먹으면서 조화가 완벽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총각김치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었다. 낯에 안경점 근처 김치 가계에서 하나 사 갖고 올까 하다 아니야 내가 직접 담가

먹을래 하고 말았다. 식당도 그렇고 모든 장사들이 당연히 높은 자릿세와 이윤을 남겨야 하기에 그들이 받는 값이

정당하다 생각하게 된다.

역으로 요즘같이 인플레이션이 심해 물가는 다락같이 오르고 생활비는 두 배 세배로 올라간 상황에서 우리 같은

전문인이라도 한 푼이라도 절약하자는 마음이 앞서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런데도 10만 불 1억이 넘는 테슬라를

사서 운전하고 다니면서 매달 월부금이 너무 많이 나간다고 투덜대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 못 한다. 차는 교통수단이지

누구에게 자랑하거나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고장 나지 않고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잘 데려다주면 되는 일로 생각하고 나는 평생을 살아왔다.


 
 
 

하루 계획한 일을 모두 맞추고 돌아와 샤워하고 쉬면서 우연히 유튜브에서 <사할린 아리랑>이란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 다. 내용은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징용에 끌려가거나 제주도에서 사할린으로 일본 놈들에 의해서 끌려가

사할린에서 추위와 탄광에서 <사할린 동포 2세들은 탄산이라 부름>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내야 했던

필설로 다 할 수 없었던  노예 같았던 삶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가슴이 시리다 못해 저려왔다.

차별과 압박 속에서 살아야만 했었고 그들은 중앙아시아로 스탈린에 의해서 강제로 이주를 당해야만 했었다.

이보다 더 슬픈 우리 민족의 비극이 있을까 그리고 일본이 2차 대전 패전 후 자국의 국민들을 모두 한반도와

사할린에서 데려갔을 때 일본 정부의 강제징용으로 사할린까지 끌려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지하 탄광과

동토에서 추위와 생존을 놓고 생사를 넘나들었던 그들은 버려져 있었다.

북은 구 소련에 의해 남한은 미국의 신탁 통치하에 들어간 상태에서 정부 차원에서 그 누구도 무국적자가 된

그들을 그 당시 막 해방된 대한민국 정부의 힘이 너무나도 약해 데리고 올 생각도 하지도 못했고 방치되어

있었다. 또한 패전국이자 전범국인 전적인 징용의 책임을 갖고 있었던 우리의 주적 일본 이란 정부는 자국 국민이

아니란 이유로 그들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그럼에도 눈을 감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다 끝내 못 돌아가고 죽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고향땅 제주도와 한국을 잊지 말라고 자식들에게 가르쳤었다. 자식들에게 조국과 한국인의 얼을 가르치고

교육을 또한 중시해 교육을 시켰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동토의 땅 사할린 숲에서는 각종 나물들과 고사리를

채취하고 러시아 사람들은 해초가 무엇인지도 몰라 동물 사육에 사용했었다는 미역과 다시마 등 해초를 동토의

살을 에는 바닷가에서 채취해 생존과 사투를 벌이며 살아야만 했었다고 2세가 된 노인들이 된 후손들이 사할인

아리랑 다큐에서 증언하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든지 같은 피부색과 얼굴을 하고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원만하다고 생각한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는 신세대들과 21세기 현주소 외국인들이

한국에 25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어려서 같으면 주한미군과 외교관들 이외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젊은 나이에 오대양 육대주로 배낭여행을 다니다 만나거나 한국에 유학을 온 사람들과 가정을 이루어 그야말로

아프리카부터동유럽과 북미 중미 남미 오세아니아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각 나라 사람들과 가정을 이루어 다 셀 수도 없다. 시대도 변했고 모든 것이 변했다. 한국인 그들의 얼굴이

변하고 있다.

그저께 직장 상사로부터 텍스트가 날아왔다. 인사과에 문의한 결과 지난 1월에 제출한 은퇴 신청 수속은

6월 30일 은퇴하는 것으로 확정되어 있는 데 곧 인사과에서 연락을 하게 될 것이란 이메일을 보스가 인사과에서

받았다고 한다. 속이 다 시원하고 후련했다. 몇 달 더해 가을까지 간들 하여 몇천만 원 더 벌어 보았자 세금으로

다 나가는 돈 이쯤에서 손 놓고 살자 하는 마음이다.

남은 인생의 여정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일이니 아직 걸어 다니고 건강할 때 은퇴하여 가보고 싶은 데

가 보고 보고 싶은 사람 찾아가 만나보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왜 벌써 은퇴하냐고 절대 완전히 그만두지 말고

일주일에 하루라도 근무하라고 하여서 어이가 없었다. 그녀 자신도 70 중반에 오래전 다리 관절이 아파서

걷지도 못하다 집안에 있는 것이 답답한지 어데선가 지금도 근무를 하는 모양새인데 아이고야 그럼 걷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못 가리고 기어 다닐 때까지 근무를 하란 말이야 싶어 귀담아듣지 않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말이지 싶었다. 사람은 자기가 손을 내려놓을 때를 알고 물러날 때를 알고 그만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물욕과 욕심은 끝이 없다. 그 또한 다 헛되고 헛된 일이거늘 영웅호걸도 천하의 억만장자도 죽을 때는

동전 한 닢 못 갖고 가는 것이 인생이다. 생각에 따라서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요

순간순간 살아가면서 느끼는 일이다. 어저께 새벽부터 시작한 자판기 두드리기 하루가 지나 지금은 금요일

새벽 4시 13분이 되었다. 한강 산책로를 산책하는 노르웨이서 여행을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유튜브에서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한강변에서 라면을 자판기에서 만들어 먹으며 한강변을 바라보며 이 젊은이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금발의 청년은  더 매웠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보다 매운 음식을 더 잘 먹는다. 그저께는 치과를 다녀오고

그 저녁에 걸어서 마켓을 가니 중년의 한국인 4명이 그룹을 지어 식료품을 구입하고 있었다. 옷차림이 말쑥한 

것이 한국에서 온 여행자 같았다. 아마도 50대나 60대로 보였다.

바로 앞에서 신용카드를 입력기에 넣는 것을 반대로 해서 기계가 읽지를 못하고 있었다. 순간 그가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입력기 패널에 뜬 영어를 보지 못했던가 보다. 뒤에서 나는 기다리고 있었고 다른 사람도

내 뒤에서 기다리고 있기에 얼른 내가 그의 카드를 계산대에서 근무하는 사람 앞에서 다시 꺼내 입력해 주었다. 

결국 읽고 지불이 되어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Sub에 짐을 싣고 있었다. 나도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역으로 한국 시스템을 모르니 저 사람과 같겠지 싶었다.

이제 2개 월반 남은 직장 생활 마음이 그저 그렇다. 크게 행복한 것도 아니요 그저 수많은 지나간 날들이

스쳐가고 있다.  그리고 그 세월 속에서 있었던 행복했던 추억들과 수없는 슬픈 추억들이 다시 살아나 다가와

바람처럼 스쳐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내 곁을 떠나가신 부모님들과 아버지들 절절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어느덧 새벽 5시 25분이 되어가고 있다. 유튜브로 보니 외국 관광객들이 한복을 입고 경복궁 벚꽃 곁에 서서

추억을 담아내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벚꽃과 노란 개나리와 수선화로 물들어 있을 한국의 산하가 보고

싶었다. 유튜브를 보면 모르는 한국어 어휘가 왜 점점 많은지 싶다. 총선 결과로 뒤덮인 온라인 한국어 신문들

그리고 여기 영어권의 UPI 통신부터 미국 언론들도 한국 총선 결과로 떠들썩하다.

총선 결과 지도를 보니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북에서는 파란색 가운데 저 멀리 점 하나 해서 보니 도봉갑과

한강 근처 마포갑과 용산만 빨간색 강남은 양옆은 모두 파란색 그리고 그 한가운데 강남 지역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8곳만 빨간색이었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올 11월에 우리도 대선을 치러야 하는 데 양당 다 찍어줄 인물이

없다, 한국 공민권이 없는 나로서는 한국 정치를 논할 일이 아닌 것 같다. 한국 경제가 좀 좋아지고 물가 안정이

되고 정당을 떠나 잘 되었으면 좋겠다.  불현듯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 50년대 말과 60년대 한국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일상에서 한국어를 전혀 사용할 기회가 없다 보니 많은 한국어 어휘가 생각나지 않을 때가

가장 답답하다. 이제는 꽃비도 지고 있겠지 싶다.

 

유튜브에서 쉬는 날은 가끔 세계 각국 식문화와 <한국인의 밥상> 같은 프로를 즐겨 시청한다. 그중에 하나가

중국요리 세계의 다큐도 들어간다. 요즘음 위에 프로 중국 남부 광동지방 즉 홍콩이 속해 있는 지방 요리 위에

에피소드를 즐겨본다. 영어자막이 있어서 볼 수 있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국어 자막도 있지만 해석이 많은

경우 옳지 않다. 그래도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어 좋다. 어떤 프로는 자막이 없는 경우도 있어 아쉽다.

중국 요리도 지역마다 다 다르고 만드는 과정은 물론 그 역사 또한 한국 음식들만큼 유구하다. 

 

중국 남부 광동 사람들은 우리가 먹지 않는 비둘기 고기를 먹는다. 이번에 수련을 나온 명문대 중국계 미국

여학생의 부모들이 홍콩 출신이라고 한다. 나 보고 하는 말이 북경 오리고기 요리를 좋아하면 비둘기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 한국 사람으로서는 그 더러운 비둘기 날아다니며 지붕에 배설이나 하고 바이러스

투성이 이런 식으로 밖에는 인식이 안 되어 먹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는 일이다. 그런데 식용 비둘기는 중국

요리 다큐를 시청하니 따로 시골 농장에서 사육을 하고 있었다. 한 다큐에서는 농학자가 과학적 자료에 근거해

사료를 만들어 사육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사람들은 가족중심적이란 것이 다르다. 요리는 주로 남자들이 하고 하나 같이 거의 다 기름에 볶는

것이고 물론 스팀으로 쪄내는 음식도 있다. 그리고 식문화가 한상 가득 차려놓고 나누어 먹어야 잘 먹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거한 상차림으로 알 수 있다. 그야말로 한식 반찬 열몇 개씩 나오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먹는 것에 진심인 중국사람들과 한국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서양식 문화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거한 밥상 차림들이다. 중국은 땅 덩어리도 크고 해서 그 다양함에 있어서 평생을 찾아다니며 먹어도

다 못 먹어보고 죽을 확률이 높다 싶은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만큼 광활한 지역만큼 음식도 수백 가지

수천가지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즐기는 것 중에 하나가 먹는 재미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특히나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을까 싶다. 먹는 것에 한국사람들 만큼 진심인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특히 국민음식 같은

돼지고기 삼겹살과 짜장면이 첫 번째가 아닐까 싶다. 4월도 중순을 향해 가고 있다. 이러다 2주가 지나면 또

5월이다 싶다. 그러다 보면 또 6월 모두에게 안녕을 고하고 현 위치에서 내려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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