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한 바퀴 돌고 돌아와 샤워하고 길을 나설 준비를 하니
아이 부부가 왔다. 기차 정거장에 데려다준다고 한 것을 그냥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하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40분을 기다려도 주말이라 그런지 오지를 않았다. 기차는 12시 10분에
떠나는 데 남은 시간은 이제 1시간 도저히 방법이 없어 아직도 집에 가지 않고 있냐고 텍스트를
보내니 있다고 연락이 왔다.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그냥 빨리 집으로 오라고 해서 돌아왔다.
내가 데려다준다는 데 고집을 피우고 그런다며 한마디 하기에 알았다고 했다. 결국 아이들 부부가
기차역에 데려다주고 돌아가고 역사로 들어가니 이미 기차 개찰을 시작하겠다고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승차하고 나니 좀 있다 기차는 플랫폼을 떠나기 시작했다. 두 시간이 지나 기차역에 도착하니 플랫폼
저위 바깥에서 피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여기 있다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반가웠다. 4개월 만에 다시
만나는 순간이었다. 꼬불 꼬불 산길을 돌아 집에 도착하니 피터 부인 D가 반가움의 포옹으로
인사를 해주었다.
가볍게 채식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피곤해 쉬는 동안 전화기 속에 든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여행 중에 부부가 찍은 사진들을 데스크탑에 옮겨주고 우리 모두 잠시 낮잠을 청했다. 저녁시간이
되어 집 근처에 있는 칼 슈트라우스라고 하는 맥주를 자체 생산하는 맥줏집이 자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하고 운동 겸 우리 셋은 산책 겸 걸어갔다. 웨이트리스의 안내를 받고
패리오에 자리를 잡고 착선을 하고 갖다 준 메뉴를 보니 이게 웬일 2월에 왔을 때 없던 메뉴가
하나 새로 등장했다.
아니 여기까지 "코리언 바비큐"란 메뉴가 백 프로 백인들만 사는 동네 식당 메뉴에 있다니 놀라웠다.
물어보니 피터 말이 맛이 괜찮다고 한다. 순간 한류가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 연어 요리를 주문하고 이 식당에서 만들어내는 맥주를 한 잔씩 주문했다. 그 어디에서도 맛을
볼 수 없는 이 집만의 부드럽고 끝에는 단맛을 살짝 느끼며 크림 맛을 느끼게 되는 맥주로 한국 맥주
중에는 이런 맛을 갖고 있는 맥주가 없는 것 같다. 한국 맥주에서는 우리 입맛에 맞는 맥주는 테라라고
생각한다. 카스는 우리 입맛과 조금은 멀다고 생각한다.
식사를 맞추고 우리는 긴 긴 산책을 했다. 깨끗하고 조용하고 가로수가 우거진 중산층 백인들과 근처
첨단기업 퀄컴에 근무하는 인도 출신 고급 IT 인력들이 모여사는 동네를 돌고 돌아 한 십 리를 넘게
걸었다 싶었다. 낯에도 아름답고 깔끔하고 모든 것이 정리 정돈된 동네다. 도시가 부자라서 일까
산책하는 개들 변을 잔디 위에 내버려두고 다니지 말라고 거리 중간중간에 개가 뒤를 본 것을 담아
갖고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작은 자연친화적인 초록색 작은 봉지가 담겨 있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가 사는 대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정경이었다.
대식을 하는 사람들이 없어 간단한 아침 식사로 충분했다. 아침 10시가 가까워 오늘은 백인 감리교회
목사님 브라이언 켄트라고 하는 분이 은퇴하는 날이라 그 교회 일부를 빌려 사용하는 한국인 교회 즉
피터 부부가 다니는 교회와 함께 예배를 본다고 같이 가자고 해서 그러마 하고 같이 참석을 하게 되었다.
참 한가하고 조용하고 정돈된 대도시 근교의 시골스러운 동네에 위치해 있었다.
예배를 맞추고 피터가 운전을 하고 한참을 달려 이 지역의 명소 식물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식물원이
하도 커서 그 안에는 미술관부터 100년 넘은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야외 음악당부터 예술가들
전시를 위한 작은 마을 공동체부터 중세풍의 교회 건물부터 이 세상의 모든 선인장 컬렉션 전시회부터
각종 베이크리와 식당부터 그 거리가 너무나도 멀어 돌아다니는 것만도 그야말로 평소 큰 행동반경이
없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벅차고 힘들다고 느낄 정도로 큰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구경이라면 빼놓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미국의 백인들이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 베이크리에 들려 커피와 패스트리 하나를 먹자고 하는 것을
나는 장이 약한 사람이란 균형을 깨고 싶지 않아 사양을 하고 피터 부부만 베이크리에 들어가 한참이
지나서야 패스트리 하나씩 그리고 커피 잔을 들고 와서 긴 회랑에 놓여 있는 테이블에 우리는 앉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길을 나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흘러나오는 야외 음악당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네 명의 연주자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작곡한 작품들과 라이자 미넬리가 부른 명곡 <뉴욕 뉴욕>을
연주했다. 그중에 세명은 지역 경연 대회에서 수상한 청소년들이었다.
평생에 처음 들어보는 파이트 오르간으로 연주한 라이자 미넬리의 명곡 <뉴욕 뉴욕>은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이었다. 백 년이 넘은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해주는 <뉴욕 뉴욕>은 얼마나
장엄하고 타오르는 불꽃같은 열정과 폭발하는 에너지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연주해주는 바흐의 <토카타>를 들으면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고 와서 연주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이후 몇 년 만에 즐겨보는 음악회 인지 싶었다.
그동안 앞만 바라보고 살아와야 했었기에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연주를 하는 동안
참 많은 관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참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젊은 동양 여성 두 명과 남성 한 명이 우리 앞줄에 와서 착석을 했다.
그런데 남성이 입은 짙은 청색의 바람막이 재킷 뒤에 Seoul National Universoty/서울 국립 대학교라고
적혀 있었다. 좀 있더니 무대가 가까운 앞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아마도 서울대학교를 다니거나
졸업을 한 사람인가 싶었다. 거의 2시간의 연주가 끝나고 우리 일행은 마지막으로 저 멀리멀리 길 건너
장미원을 들리게 되었다. 속 시원하게 뻥 뚫린 앞의 시야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각종 장미들 산들바람이
스쳐갔지만 그래도 햇살이 따가웠다.
모두 일정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셋은 유서 깊은 와이너리에 들렸다. 아직 포도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한 잔에 10불인 시음 포도주를 하나씩 시켰고 그 사이에 피자와 문어 요리를 주문했다. 피자 맛은
우리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담백한듯 하면서도 가볍고 산뜻하며 바삭바삭하며 맛났다. 문어 요리와
포도주와 완벽 하게 어울리는 맛이었다. 모두들 백인들 속에 한 명의 흑인 그리고 우리 일행 세 명 그리고
저 건너편 교회에서 온듯한 한 무리의 한국인들과 인도 계열의 몇 사람들이 비백인으로서 전부였었다.
오후의 햇살 속에 다들 와인병 하나씩 손에 들고 테이블에 앉아 친지 내지는 가족들과 하루 주말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 하나같이 다들 질서정연했다. 이속에 중국 본토 여행객들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지금 자판기를 두드리며 생각난다.그들의 시민의식과 각종 매체에 올라오는 해외 각국 태국은 물론
스웨덴과 각 지역에서 발생하는 그들의 추태들이 겹쳐져 스쳐갔다. 나라가 크면 무엇하고 인구가
많으면 무엇 하나 싶었다. 시민의식이 땅바닥이고 개선될 여지가 없는 국민성인데 싶었다.
유튜브에 떠돌아다니는 클립 하나 태국 뷔페식당에서 중국인들이 집단으로 달려들어 손으로 컵으로
마구 음식을 쓸어 담아 난장판을 만든 중국 여행자들의 추태가 대표적이다. 70-80년대 일본 농촌
사람들이 한국과 동남아를 다니면서 부린 각종 추태들 그리고 그 이후 한국인들이 자유여행을 하게
되면서 동남아와 유럽 각국에서 벌린 각종 추태들이 스쳐간 지금 그 자리를 중국인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한국인과 중국인의 차이는 명백하다. 그동안 자유여행을 통해 그리고 국내 산업 발전을
통해 한국인들의 경우 시민의식이 깨어나고 향상되고 또한 사회적인 암묵적 질서와 매너가 자리를
잡았다면 중국이란 나라는 체제도 다르고 문화도 달라 아직도 먼 나라임에 틀림없다.
일본 국민들의 정치 무관심으로 자민당이 일당독재를 하는 모습이나 수동적이고 전통에 얽매어
변화를 싫어하는 아날로그의 일본의 현실 그럼으로 G7 선진국 대열에서 유일하게 디지털 후진국이다.
공산체제란 일당독재와 철통같은 감시와 통제 속에 살아가며 중화사상 즉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란
어리꽝스런 국수주의로 눈과 귀를 막고 통제 속에 살아 한국인들은 가난해 과일도 못 사 먹고 고기도
못먹고산다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로 자국민들을 속이는 중국이나 일본 국민들의 정치무과심과
과연 무엇이 크게 다른가 싶다.
일본의 경우 디지털 후진국이다 보니 네이버가 만든 일본판 카톡인 라인을 재일 교포 3세로서 일본
국적자인 일본 야후 주인을 디딤돌로 하여 한국인 간부를 내치고 네이버로부터 빼앗으려고 하다
요즘은 어떻게 되었는지 주춤한 이런 한심한 나라가 이웃나라 일본이다.
집으로 돌아와 그 밤 우리는 <A Man Called Otto/오토라는 남자>란 영화를 함께 보게 되었다.
중간에 피터와 부인은 피곤해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이 영화를 끝까지 거실에서 시청하고
맞추었다. 참 나 자신을 뒤돌아 보게 하는 영화로 곧 눈앞에 다가온 은퇴란 것을 재조명하게
되고 그 후를 생각하게 하는 나 자신 개인에게는 감명 깊은 영화로 생각 되었다. 영화를 맞추고
나 또한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은 영화로 탐 행크가 주연인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낯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를 노천에서 참관한 관계로 얼굴 이마와
콧등 머릿속 정수리가 빨갛게 타 바려 밤이 되니 얼마나 쓰라려오는지 몰랐다. 3일이 지난
오늘까지도 머릿속이 살짝 쓰라리고 앞 이마는 피부가 벗겨지고 있다. 몇십 년 만에 이렇게
피부를 그을렸는지 모른다. 분명히 모래 직장으로 복귀하면 타버린 피부를 보고 다들 한마디
할 것이 뻔하다.
월요일 새벽 4시 반부터 부엌에서 덜거덕 거리는 소리에 일어나고 말았다. 피터가
먼저 아침식사를 맞추고 부인에게 하루를 시작하고 다녀오겠다고 키스로 인사를
하고 길을 나셨다. 피터가 떠난 후 피터 부인과 나는 아침식사를 맞추고 긴 산책길에
나섰다. 육 천보를 넘게 동네를 돌고 돌아 걸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커피 샵에
들려 커피를 하나씩 들고 돌아와 바로 출발을 해 나를 기차역에 내려주고 이별의
포옹으로 인사를 서로 나누고 헤어졌다. 떠나면서 언제나 다시 와도 좋으니 다시
놀러 오라고 하고 떠났다.
구름다리를 건너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 플랫폼에 서서 한참을 기다리니 기차가 도착했다.
앞 칸으로 가니 백인 어린아이들이 단체로 가족들과 난리 법석을 피워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중년 백인 여성은 복도를 가로막고 서서 일행과 수다 떨기가 바빴고 하여 나는 뒤 칸으로
가고 또 가서 비즈니스석 칸 옆에 있는 텅 비고 조용하고 깨끗한 칸 입구에 다른 백인 여성과 함께
승무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조용하고 깨끗해 우리가 갖고 있는 기차표로 앉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저 멀리서 어린듯하고 아주 젊은 여성 승무원이 다가와 앞 칸이 너무 시끄러워 그러는데 저 뒤
조용한 빈칸에 돈을 더 지불하고라도 앉아갈 수 있냐고 물었더니 갖고 있는 표로 괜찮으니 가서
앉아도 된다고 하여 백인 여성에게도 승무원이 괜찮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하니 다음 칸에 가서
늙은 부모님 두 분을 모시고 와 같이 착석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가 내 앞에 앉아
있는 데 서로 다리를 뻗을 수 없어 양보하고 다리를 펴고 있으라며 나는 저 멀리 뒷자리 빈자리
창가에 앉아왔다.
기차에서 내리자 마가 지하철과 연결되게 되어 있다. 하도 역이 커서 방향을 알기가 힘들어
물어보아야만 했다. 지하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두 번인가 내려가니 역에 안전요원들
몇 명이서서 도착한 기차에 들어가 일단 검사를 하고 목적은 홈리스 같은 부랑자들이 있으면
내쫓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고 다 끝나니 지하철의 모든 문이 열렸다. 승차를 했다.
다음 역에 서니 자전거를 갖고 타는 흑인에 스쿠터를 갖고 붐박스를 갖고 타고 음악을
틀어대는 중년의 흑인 그때까지는 그래도 자리가 있었다. 다음 역을 지나니 이게 뭐야
흑인들이 유치원 국민학교 정도 나이의 아이들과 함께 가족인지 그룹으로 승차 후 아이들은
손잡이에 매달려 점프를 하고 난장판을 이루고 나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고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들 네 다섯 명이 전부고 나는 복잡한 지하철 기차 안에서 흑인들로부터 포위 아닌
포위를 당하고 있었다.
한국 지하철처럼 방어벽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위험하다. 철길에 떨어지는 날이면
비상사태가 되는 것이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는 데는 에스컬레이터를
세 번이나 타야 하는 깊은 곳이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되지 않아 다행히 도착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한일은 샤워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다시 읽고 싶어 하는 피터를 생각해
책을 알라딘에 알아볼 예정이다. 구해서 감사의 편지와 함께 피터 에게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부인에게는 갖고 있는 새 성경을 부쳐주려고 생각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식사를
같이 하며 와인을 야외에서 같이 한잔 마시는 동안 피터의 앞이마를 보니 참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생각했다.
젊은 날의 팽팽하고 머리숱도 많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른쪽 앞이마를 보니 참 내 친구도
많이 늙었구나 싶었다. 내가 아홉 살이 더 많은 데 같이 늙어가기도 하고 지나온 30년도 넘는
함께 한 세월이 무정하다 싶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늙어가고 있다.
조금 전 한국 남도 광주에서 이해인 수녀님 팔순 잔치를 마련한 분들 무지개 회원들 가운데
한 분으로부터 1시간도 넘는 녹화된 행사 비디오를 보내주셨다. 하여 카톡에서 지메일로 옮겨
다시 열어 큰 모니터로 시청하는 가운데 바이올린을 연주하시는 남성 회원 되시는 분이 낭독하는
시가 하나 있어 찾아보았다. 바로 <나를 키우는 말>이란 이해인 수녀님의 시였다. 수녀님의
<민들레의 영토>는 젊어서 읽어 보았던 작품들이다.
나는 법정 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의 작품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법정 스님의 작품들은 거의
다 90프로 읽었다. 내 영혼을 청소해 주고 위로해 주는 안내도가 되는 작품들이라는 데는
더 말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빈센트 밴 고흐의 서간문과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작품들은 내가 가장 아끼는 작품들이다. 내일 하루 더 쉬고 직장으로 모래 금요일 돌아간다.
그리고 2주 반 후 나는 대단원의 막을 내 인생에서 내리게 된다. 이번 여행은 나를 위한 은퇴
여행과 같았다.
나를 키우는 말-이해인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의외로 문학과 철학 예술을 좋아 하는 피터다. 그래서 일까 많은 말이 오고 가지 않아도
함께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가 편안하고 마음이 통하고 행복을 심연에
느끼게 되는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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