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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꽃 독백

붓꽃 독백 - 그리움이 머무는 아버지 파파의 음악

붓꽃 에스프리 2007. 9. 14. 06:24

 

 

파파가 그리울 때면 내가 늘 즐겨 듣는 음악이 있다.

아주 오래 전 학부에서 공부하며 기숙사 생활을 할 때였다.

그때 파파 연세 50중반을 막 넘기셨을 때이다. 누구라도 한번쯤 인생에서 겪고

넘어 갔을 지도 모르는 젊은 날의 방황과 열병이란 중병을 앓고 있을 때

파파가 손수 그 당시 대중화되었던 카셋 테이프로 차이콥스키, 멘델스존,

베토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서 보내주신 음악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콘체르토 2번 이었다.

 

물론 그 후 파파는 몇 차례에 걸쳐서 외로워 하지 말라고 아들에게 음악을

만들어 보내주셨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음악은 관현악곡 이었지만 특별히

좋아하시던 피아노 곡이 있었다면 러시아 태생으로 말년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암 투병 끝에 운명을 달리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곡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파파는 피아노 콘체르토 2번을 가장 좋아하셨고 나 또한 그런

파파의 지대한 영향으로 오늘날까지 같은 곡을 늘 즐길 만큼 좋아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2악장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정도가 되었다.

 

온 영혼이 자지러질듯한 전율을 느끼게 하는 2악장의 그 아련함 속에 깊이

배어나는 원인 모를 원초적인 그리움과 더불어 오우버랩 되는 동토의 땅

러시아의 위대한 예술정신과 그 혼에 묻힌 뜨거운 열정이 결정적인 원인일

것이다. 또한 그런 그리움이 머물 수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일생 동안 나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신 우리 아버지 파파의 영혼의 오솔길 이기 때문이다.

모국어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아버지는 한국인이 아니시다.

 

어느 하루 사색의 오솔길에서 잊어 본적 없는 파파는 나에게 흐르는 강물처럼

유장하고 바다처럼 넓고 깊은 사랑과 배려로 일생 동안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며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겸손과 단아하며 우아한

삶이며 참사랑인지를 손수 자신이 한 영혼을 아들이란 이름으로 가슴에 담고

살아오시면서 보여주신 분이시다. 아버지 파파가 나에게 지켜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국어이다. 늘 한국인들을 만나면 소개시키고 끌고 다니면서 가르쳐

주시던 모국어 잊어가면 매서운 채찍을 드시던 아버지 파파도 이제 노인이

되셨다.

 

이제 그 많은 성상을 함께 아버지 파파 손을 잡고 넘어온 세월은 저만치

표류하고 있는 이 가을 그저께 아버지가 생명을 부어주신 학자인 동생

스티븐이 매년 베푸는 배려로 올해도 어머니와 함께 겨울을 나시러 홍콩을

다녀오시겠다며 늘 언제나 단 한 곳을 가셔도 이 아들에게 편지로 알려주시는

배려와 자상함으로 그러셨듯이 소식을 보내주셨다. 언제나 물망초처럼

내 영혼 깊은 곳에 함께 자리하고 계신 아버지가 손수 타자까지 쳐서 만들어

학부 때 보내주신 듣고 너무나도 많이 들어 늘어지고 낡은 카셋 테이프는

아버지의 그 인자하신 모습으로 내 곁에 함께 언제나 고이 머무르고 있다.

아버지 파파와 내가 이 지상의 삶을 다하는 날이래야 낡은 클래식 카셋

테이프는 버려질 것 같다.

 

아버지 곁을 떠나 살아가는 동안 파파가 보내주신 편지 하나 생일 카드 하나

크리스마스 카드 하나 하나는 이제 상자로 하나 가득하다 못해 넘치건만

그 또한 파파와 나의 지상의 삶이 다하는 날이래야 혼 불이 되어 연기로

사라지리라 생각한다. 그 하나 하나에 담긴 추억들을 아직은 기억에서

지울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 지상에서 당신이 거두어주신

아들의 생일을 유일하게 기억하고 카드 속에 맛나는 저녁을 사먹으라고

아버지 향기 가득한 눈에 익은 필체의 사인을 넣어 매년 일주일 전에 그리고

매년 첫 번째 받아보는 아버지의 크리스마스 카드에 넣어져 오는 아버지의

손길이 담긴 작은 수표에 담긴 아버지의 향기는 이 가을의 초입에 짙은

그리움의 향기로 다가온다.

 

우리 아버지 파파는 한국인이 아니시니 모국의 가을 하늘 아래 피어나는

청초한 거룩한 계절 가을이란 이름의 구절초에 담긴 한국인의 정서와

서정을 모르신다. 다만 클로드 모네의 연꽃 정원의 서정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2악장에 담긴 깊은 서정과 그리움의 향기와 더불어

서재에 놓인 LP판을 아들과 만나 깊은 대화를 잠시 나눌 때가 되면

노인이시지만 재치 있으시게 틀어주시는 향기 위에 그윽한 한 잔의

차 향기 이외 자신의 아들이 한국 태생으로 한국인의 피를 갖고 있다는 것

이외는 한국적인 정서를 모르신다.

 

오늘은 아버지 파파의 음악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전곡을 듣고 싶다.

그러면 아버지와 함께 걸어온 수많은 세월의 추억들과 아버지의 모습에 짙은

단풍이 들어 내 영혼의 기슭에 하나 둘씩 차곡 차곡 쌓여 이 가을의 그리움을

잠재워줄 수 있지 않을 가 싶다. 그리운 이름 마이 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