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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꽃 독백

붓꽃 독백 - 가을 초입에서 불러보고 싶은 그 이름 아버지

붓꽃 에스프리 2007. 9. 18. 19:33

 버어지니어 Saltville 죠지 형님네 뒷산 10월의 정경

 

 

“아버지”

이 보다 더 따듯하고 다정한 언어가 있을 까?
모성애의 상징 “어머니”는 오늘만큼은 예외다.
누구에게나 한 자락 추억이 있을 법한 그 이름 “아버지”
세상에는 좋은 아버지도 많다면 역으로 제대로 자식들에게 부모의 역할을 못한
상처만을 남겨준 아버지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 모두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그 이름 “아버지” 유달리 이 가을에 가까이 아주 가까이 영혼
저 깊은 곳으로 다가온다. 특별히 그 분이 생명을 부어주신 아버지가 아닌 경우는
더욱 더 특별한 감성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낳아준 아버지가 절대 다수 거의 90% 이상을 그 확률에 있어서
상회한다면 그렇지 않고 양육시켜주었거나 인도하여주신 아버지가 작게
아주 작은 확률로 누군가의 영혼을 거두어 주시는 아버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우린 가끔 목격할 수 있다.

아버지,

언제나 불러보아도 이 보다 더 따듯하고 다정하고 넉넉한 이름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 아버지는 아주 오래 전 공부를 가르쳐 주시던 담임 선생님 이셨다. 그때만
하여도 젊은 청춘이시던 아버지는 그 먼 추억의 뒤 안길 박봉의 교직에서 상록수
같은 분으로 사도의 길을 정도로 일생 동안 걸어오신 분이시다.

타인, 그러나 타인이 될 수 없으신 우리 아버지 유달리 가을이 되면 더욱 더
그리운 분이시다. 국화꽃을 그토록 좋아하시던 분 가을 하늘 드높아지고 높새
바람 불어오면 점심시간이면 홀로 나무 밑에 앉아 있는 외로운 소년을 뒤로 와서
와락 껴안는 순간 누구냐고 팔꿈치로 치면 지긋이 미소를 지어주시며 가슴에
안아 주시던 선생님이시던 우리 아버지는 죽음으로 인생의 청지기를 잃은
소년이 기대일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얼마 후 영원히 그 아버지를
뒤로 하고 떠나 와 다시는 내 생애에 돌아갈 수 없는 모국 그 길 목을 언제나
지켜주시며 나를 기다려주시는 아버지는 아직도 모국어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신 유일한 분으로 이제 어언 칠순을 넘기셨다.

모두가 낯설고 낯선 사람들만 살아가는 모국은 먼 외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 어느 곳에서도 지난날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이 변해버린 산과 들 그리고
거리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아버지의
사랑일 것이다. 아버지 또한 백발의 노신사가 되셔서 아직도 교회에 봉사하시기
바쁘시니 그 또한 축복이 아닐 수가 없다. 노인 분들 소일 거리가 없어 노인정이나
가셔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면 아직은 자녀와 손주 형제들 찾아 호주로 미국으로
오고 가시면서 거동하실 수 있으시고 손수 운전이라도 하실 수 있으시니
다행이시다. 아버지의 배우자가 되시는 어머니가 돌아 가신지도 어언 17년
혼자되신 아버지 곁으로 날아갔던 그 오래 전 물도 설고 낯도 선 곳에서
1년간 아버지 뒷바라지 하여드리며 살았던 그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이 계절에
스쳐간다.

조강지처를 가슴에 묻으시고 타의 반 자의 반으로 할 수 없이 상처하신 후 1년
반 만에 재혼을 하셔야 하였던 아버지,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어찌나
배신감과 서운함으로 괘씸하시던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또 다른 먼 외지 영국에
살면서 2년 동안 소식을 뚝 끊고 살던 세월 결국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받아드리고 용서와 이해로 보듬어 드릴 수 밖에는 없었고
세월이 좀더 흐른 후에는 그랬던 자신의 행위로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던 아버지
의 마음 이었을 까를 헤아릴 때는 아픔뿐이었다.

축복으로 더없이 선하시고 아름다운 새어머니가 아버지의 아름다운 동반자가
되셔서 신실한 신앙생활을 아버지와 더불어 하여주시고 두 분 행복하게
살아가시니 바다 건너 매주 전화를 드려도 그리 감사하고 감사할 수가 없다.

세월이 흐르고 동생들 또한 다 자라서 부엌에서 같이 밥하고 살림하며 학교 다니며
아버지가 월급봉투를 통째로 갖다 주시면 용돈을 주기만 하면 그 주로 다 써버려서
내속을 그리도 썩이던 둘째 동생은 호주로 유학을 가 대학원을 나온 후 호주에
정착하여 그 나라 사람이 되어 자식 낳고 공인회계사로 살아가는 세월 큰 동생도

40줄을 넘기고 회사에서 파견하여 지금은 북경에 가 있고 두 분만이 둥지를 지키고

계시다. 전화 몇 주 못드렸더니 어디가 아프냐며 걱정을 하시며 국제전화를 몇일전

노파심에 하셨다.

살아계시고 건강하실 때 마음이든 무엇이든 잘해드려야지 병석에 누워계시고
돌아가신 후에는 백해무익이요 무용지물이란 지론에 아버지에게 매주 국제전화를
해드릴 것 그리고 생신 날은 세상없어도 기억하여 드리고 2 -3년 마다 모셔와
함께 먼 여정에 오르는 것이다. 그랜드 캐년도 무척 경이로워 하셨지만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을 참 좋아하셨던 것 같다. 아직은 멋스러운 낭만과 인생의 멋을 아시는
노신사이신 아버지의 수화기 너머 음성은 언제나 따듯하고 다정하시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런 모습이신가 보다. 아버지의 고독과 외로움을 헤아리는 아들의
마음이고 싶다.

생명을 부어주신 아버지는 아니셔도 영혼의 생명을 사랑으로 양육시켜주시고
자신의 어떤 고난과 시련과 역경에서도 붙들어 주셨던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는
가을의 초입 영원한 나의 아버지를 추억하는 이 아침 아틀리에로 달려가
그리움을 캔버스 위에 토해내고 싶다. 아들을 기다리시고 계신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계시니 진정 감사의 계절 가을이다. 말러 교향곡 10번이나 아틀리에에
가득 틀어 놓고 붓질을 하여야 하겠다. 아버지, 그 영원한 그리움의 언어
그리고 뉘앙스.............아버지의 손을 잡고 언젠가 다시 가을에는 국화꽃 들고 가
먼저 가신 어머니 산소를 찾아가 그리움을 내려 놓고 산을 올라야 하겠다.
아버지……………당신은 영원한 그리움 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