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고 나
순수한 영혼의 사색과 사랑 그 영원한 삶의 에스프리

붓꽃 독백

붓꽃 독백 - “Allegri Gregorio- Miserere mei dues” 과 함께 하는 사색

붓꽃 에스프리 2007. 9. 20. 06:42

 

 

하얀 밤이 깊어가는 시간 유서 깊은 영국의 “Choir of New College, Oxford” 대학

합창단원들이 부르는 경건한 그레고리언 성가 “Allegri Gregorio- Miserere mei dues”를

듣고 있노라니 비로소 내 가난한 영혼은 하루의 일과 후 진정한 안식을 취할 수 있다.

어느 산세 깊은 곳 은둔처 수도원에 있는 느낌이다. 비로서 경건함 앞에 무릎을

꿇는다. 에밀리 디킨슨이 그랬다지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것이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리.

 

이 얼마나 절실한 언어의 감각이며 진실인가.

그렇다 우리 인간 각자는 자기 영혼과 지성과 인생경험과 사유의 깊이만큼만 사랑을

가슴에 담을 수 있으리라 아니 그것이 진실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담을 수 없다.

각 개인은 자기성찰만큼만 사랑과 우정 그리고 정도 담을 수 있다. 자기성찰이란 곧

개 개인이 갖고 있는 한계상황이기 때문이다.

 

사랑할 때 사랑은 축복이지만

사랑을 잃었을 때 사랑은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므로 라고 천양희 시인은 읊조리고 있다.

 

우연히 발길을 내디딘 곳이 어느 과거 한국의 3대 명문고등학교에 해당하는 한

고등학교 동창들로 구성된 동창회 산악회 홈페이지였다. 산악회 회장이란 분의

사진 속에 모습으로 보아하니 70을 훨씬 넘기셨다. 서울근교에 위치한 산으로

산행을 하러 간 모양이다. 산행 중 어느 젊은 이가 길을 물은 모양이다.

그 젊은 이가 백발이 성성한 이분을 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른 모양이다.

손주들이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귀엽지만 타인이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기분이 언짢고 화가 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래 그 젊은이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야속해 홧김에 길을 반대로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놀부심사 같은 노인이라고 길을 묻는 젊은이에게 길을 반대로 가르쳐

주다니 싶었다. 순간 생각나는 것이 그럼 뭐라고 부른단 말인가 이었다. 그럼 젊은

이가 노형이라고 부르기라도 하기를 기대한단 말인가 아니면 선생님이라고 그런데

그가 가르친 제자는 아니지 않은 가 말이다. 그럼 어르신 그럼 그럴만한 인격이라도

갖추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분별 가능할까 노상에서 노형이라니

아버지도 더 되는 분에게 어찌 그럴 수가 있는 가 싶다. 한국어에는 호칭이

얼마나 어렵고도 애매모호한 일인지 모른다. 부르라고 만들어준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생각하면 참으로 난감하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이든 사람이나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면 미스터, 미스, 미쎄스라고 호칭하지만

다정한 사이나 보통 아는 사이라면 이름을 부르는 서양의 문화와는 너무나도

다른 문화배경으로 하여금 어려운 부분이다. 그럼 산악회 회장이란 노인을

뭐라고 젊은 이는 위의 글 상황에서 불러야 옳단 말인 가누군들 늙은 뉘앙스가

담긴 호칭으로 불리고 싶겠냐만 인간은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현실인식도 중요하다 하겠다. 객기로 호기로 흘러가는 세월의 흔적을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잖은 가.

 

다른 하나는 직장 내에서 상사로부터 폭행에 관한 MBC 방송을 다룬 각 신문사들의

기사내용이 가관이다.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한 부분이다. 선진국 같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인권유린이다. 회사 주인이라고 자기 직원을 폭행하거나 언어폭력

또한 용납이 안 되는 선진국을 생각한다면 아직도 멀었다 싶다. 직장상사가 폭행을

하였다가는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거나 해당회사는 인권유린으로 대 소송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물론하고 상해 정도에 따라서 때로는 평생을 먹여 살리는 경우도

가능할지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회사 문을 닫아버리던지 누가 누구를 때리고

짓밟는 다는 것인지 무법천지도 그런 무법천지가 없고 더 가관인 것은

가해자들의 당당함의 파렴치한 양심부재의식과 윤리와 도덕과 인권에

대한 무지이다.

 

인권사각지대인 중진국 한국의 모습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런 무법천지의 악행이 소수의 일부라 할지라도 도대체 국가의 법은

실종되었다 다 무엇을 하고 있나 싶다. 퇴근 후 온라인 한국어

디지털신문에서 직장 내 폭력기사를 보고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런 나라 저런 직장생활도 있나 싶었다. 우리 직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즉시 경찰은 물론 변호사와 주정부가 개입되거나 연방정부가

개입되지 않을 까 싶다. 그리고 해당 직장은 어마어마한 인권유린에

대한 처벌과 상해 보상비를 지불하여야 됨은 물론이요 가해자는 그대로

즉시 100% 감옥으로 직행내지는 어머 어마한 보석금을 내야만이 풀려나서

일단 재판을 받게 되리라 생각한다. 상상조차도 불가능한 일이다.

머리카락 하나만 잘못 건드려도 충분히 법이 개입되는 사회에서 바라보는

폭력직장 생활은 경악 그 자체이다.

 

조폭 회사도 아니고 도무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정부는 물론 해당 법무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슬픈 현실 앞에 도무지 저런 직장도 있나 싶은

생각에 분노로 가슴을 쓸어 내려야 하였다. 저런 기사들이 선진국 언론에

실릴가 보아 걱정이 된다. 실린다면 그들이 한국이란 나라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선진국으로 도약하기에는 아직도 멀었다 싶은 현실 고발이다.

기술약진만이 선진국이 되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인권의식이나 사회의식 질서의식과 총체적인 국민의식의 업그레이드가 될 때만이

비로소 한 국가는 경제성장과 기술약진과 기초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선진국으로

진입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Allegri Gregorio- Miserere mei dues” 하나만으로도 영혼은 맑아진다.

거룩하며 경건한 그레고리언 성가는 종파와는 관계없이 음악이 주는

잔잔하고 경건함 하나만으로도 세속이란 일상의 온갖 정신적인 공해와

찌꺼기에 지친 우리 영혼을 포용하고 안식을 주기에 충분한 힘이 실려있다.

들꽃 가득한 가을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나 어느 수도원 뒤란이나

풍경소리 들려오며 낙엽 하나 둘 뒹구는 정결한 가을이 내리는 절간 뜨락이나

뒤란을 산책하고 있는 아름다운 감성을 그대 가슴에 담아주기에 충분한

곡이다.

 

가을이 서성이고 있다.

하나 둘 그리움, 보고픔, 애절한 감성과 절실함으로 채워지는 감성들로

나열되는 계절의 애상들은 빨간색, 주황색, 노랑색등으로 단풍 들어 가리라.

저 먼 사색의 끝부분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들 그리고

자작나무 오솔길 그 너머에 있는 자신이란 고독과 실존을 만나게 되리라.

그러면서 가을은 오고 깊어가고 또한 떠나가리라.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시인이 읊고 있듯이 그리움이란 사랑 한 자락을 가슴에

담고 깊고 유장함이 함께 흐르는 그리운 이름들 그 영혼의 눈빛을 바라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