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온몸과 영혼이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지는 연속인 지난해 크리스마스 바로 전부터
시작된 독감은 지독하게도 몸부림을 치며 주인을 놓아주지를 않는다. 날까 싶은 날
직장동료의 독감시작으로 다시 그날 이후부터 시작된 2차로 다가온 독감의 침입은
잔인하다 싶을 정도이다.
첫 번째는 위장 장애가 병행되어서 음식물을 삼키면 마치 모래가 식도를 타고 갈퀴로
한바탕 훓고 지나가는 것처럼 아프고 어지럽고 지속되는 열과 두통과 콧물과 목이
아팠다면 두 번째는 코가 막히고 지속되는 고만 고만한 두통으로 온종일 머리 속은
강가에 안개가 잔뜩 낀 날 같고 목소리는 완전히 쇠 소리를 내고 온몸 삭신에 근육통을
동반하고 있다. 나른함에 식욕은 물론 달아 난지 오래고 입안 조차도 다 헤지고
약 기운에 조름이 오기는 이루 다 말도 못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항생제 남용은 그 한도를 넘어가 이제는 슈퍼버그가 출현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툭하면 감기약을 달라고 하면 항생제를 넣어 주던
동네 약국들 지금은 그런 시대는 지나 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항생제를 남용하고 있는 지는 이루다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런 남용이 어떤 결과를 우리에게 긴 안목으로 가져오는 지를 모르니
한마디로 무서움을 모른다는 말이 된다. 항생제, 할머니나 아줌마들이나 할아버지나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소희 말하는 마이싱 그 마이싱의 남용이 우리 모두를 죽음의
골짜기로 내몰 수가 있다. 진정 우리가 위기에 처하여 있을 때에 우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내성이란 것이 얼마나 가공할 만큼의 무서운 독성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콩팥을 그대로 짓이겨 놓는 악동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서는 함부로 약을 복용할 수는 없다.
약을 복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주의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지를 인지할
필요가 있다. 긴 안목으로 그런 문제들을 피하려고 투병을 하다 보니 이토록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휴무를 하면서 조용히 주기도문을 소프라노 신영옥의
아름다운 음성으로 들어보며 지친 영혼에게 안식을 주어본다. 기도하는 마음은
어떤 종파나 종교를 떠나서도 아름답다. 자신의 고백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제는 대낮에 비가 내리고 동시에 우박을 동반하는 기상이변이 있었다.
우리 지방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쉰 목소리로
근무를 맞추고 돌아와 한 일은 불현듯이 아이랜드가 배출한 Nocturnes의 대부가
되는 John Field가 작곡한 “Nocturnes”을 유명한 음악교육가인 피아니스트
김대진씨의 잔잔하고 단아하며 따듯하고 섬세한 연주로 들어보는 조용한 시간을
가져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접하니 반가웠다. 이 곡이 훗날 폴란드가 배출한
피아노의 시성 쇼팽이 그 유명한 “Nocturnes”을 작곡하게 되는 예술의 영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특별한 두 작곡가의 Nocturnes을
비교하며 듣고 감상하는 재미란 보통 쏠쏠한 것이 아니다.
쇼팽의 야상곡이 우수와 깊은 사색이 담겨 있고 감성을 지극히 예리하게 자극하고
있다면 John Field의 야상곡은 멜로디가 상당히 잔잔하고 경쾌하며 감상하는 사람의
감성을 애잔하게 끌어 안아주고 있는 포근함이 있는 큰 차이를 갖고 있다. 그리고
연주만으로 이어지는 푸치니의 토스카 중에서 “별은 빛나 것만”은 지구촌이
기상이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때에 우리의 허기진 영혼을 따듯하게 보듬어준다.
겨울비가 와야 할 때에 때아닌 눈과 우박이 대낮에 쏟아지고 눈이 와야 할 곳에
겨울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철없는 기상이변은 우리 인간이 초래한 자연재해가 아닐
수가 없다. 문명의 발달이란 이름 아래 우리는 자연을 혹사하고 자연은 그에 상응하는
신음 속에 기상이변과 각종 공해로 새로운 문제들을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다.
극지인 그린랜드의 빙하가 녹아 내린 자리에는 처음 보는 섬이 나타나고 탐험가들은
자신들의 이름으로 섬을 명명하고 이변이요 가공할만한 공포의 자연재해를 예고하는
전초전인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지구촌이 가다가는 다시 빙하기가 지구촌에 오는 것은
아닌지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그분이 4월 어느 날 비가 내리던 날 이승을 떠나시기 전 병상에서 그분의 손을
잡아드리면서 약속한 것이 하나 있다면 살아가면서 불현듯이 그분이 그리운 날에는
내가 처음으로 그분의 병상에서 들려드렸던 잔잔하고 따듯한 감성이 담긴 잔 휠드의
낙턴을 들으면서 가신 분을 추억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곡을 처음으로 안겨주신
분 또한 년 전에 암 투병 끝에 떠나가신 지성적인 백학 같으셨던 해외한국 대사관
문화공사로 근무한 경력을 갖고 계신 어른이셨다.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계셨던
분들은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그분들과 함께 즐겼고 함께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한 감성의 교류를 공유하였던 음악은 아직도 함께 남은 자와 호홉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몸이 너무나도 아프니 독서를 위한 책은 물론 어떤 것도 가까이 할 수가 없다.
약을 복용하고 침대에 두러 누워 온전히 육신에 안식을 부여하는 일 이외는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잔잔히 비발디의 “사계”나 잔 휠드의 “낙턴”을
낮은 발륨으로 틀러 놓고 수면을 취하는 일 이외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생각을 할 여력이 없다. 그저 육신은 지칠 대로 지쳐있다. 이젤 앞에
앉아서 캔버스 위에 붓질 조차도 할 수가 없다. 지난해 독감예방주사를 전해와
같이 맞지 않을 것을 얼마나 후회하는 지 모르는 이번 독감의 지독함이다.
맞았더라면 앓아도 좀 덜할 텐데 하는 어리석음을 인지하는 순간이다.
지독하게 아프다 보니 눈조차 침침하다.
가는 세월을 어찌 붙들어 매어두랴 싶다.
세월도 가고 우리네 인생도 덧없이 세월과 함께 그렇게 흘러가거늘 우리는
영원히 지상에 머물듯이 지나친 욕망으로 악착을 떨고 남에게 오만과 못할
짓과 말들의 배설로 독설을 퍼붓고 상처를 주고 독선을 부리고 자기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안하무인으로 가관 치도 않게 행동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주변에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가 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나 상대에게는
한치의 여백이 없는 무례함은 소이 배웠다는 식자층이 때론 더 함을 어찌
부인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사실이다.
인간은 인간다울 때가 가장 보편적이고 아름답다. 그것은 내가 힘들면
타인도 힘들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은 타인도 싫어함에 있어서 똑 같다는
자의식을 일깨우고 그에 걸 맞는 행동양식을 실생활에서도 그대로 삶으로
살아가는 진실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가 있다.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그래 이 병치레도 훌훌 털고 일어나 가볍게 발걸음도 하고 창밖에
회색 빛 하늘이 아닌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이름 모르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남도 바라보고 싶고 봄의 월츠를 듣고 싶다.
이제 약을 먹고 잔잔한 잔 휠드의 낙턴을 틀어 놓고 다시 자리에 누워야
하겠다. 코가 막히고 눈이 침침하고 삭신이 으시시하고 아프고 쉬라고
신호가 오고 있다. 그리운 이름들을 가슴에 담고 침대에 누워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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