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고 나
순수한 영혼의 사색과 사랑 그 영원한 삶의 에스프리

붓꽃 독백

아버지, 당신은 누구신가요?

붓꽃 에스프리 2006. 12. 16. 20:53

 

부활절 어느 날 Calgary/캘거리 다운타운 정경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행복의 가치와 목적이 어데 있는가 하는 것은 각자
시각의 차이와 살아가는 과정에 따라서 다르다.

또한 행복의 조건 중에서 우리가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인간 사회 구성 요인 중에 하나로서 루소의 "사회계약설"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정의와 더불어서
너와 나란 개체가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 속에 담겨져 있는 인간의 정리와 사랑과 봄날
지평선 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따듯한 온기와
이성적이고 자기 일상과 인생에 거는 기대와 그 성취도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보는 것이 보다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주어진 일상의 불행과 운명을 딛고 일어서서 인간승리를
당당하게 외치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번 캐나다로의 겨울 여정은 개인적으로
특별한 상징성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1. 이제는 만 77세 되신 이방인이신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7년만의 재회
2. 이방인 아버지에 대한 풀리지 않은 해답을 찾는 것이었다.
3. 글벗들과의 만남


아침 일찍 공항을 떠나서 유타주 주도 Salt Lake City에
도착하였을 때는 연발 착으로 인하여서 간신히 작은 소형
비행기 맨 뒷좌석에 배치되어서 북으로 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후 4시에 비행기가 도착하는 것으로
알고 계셨는데 한 시간이나 연착이 되어 날아가니 기내에서도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가 염려가 되었다.

7년이란 세월 속에 아버지는 도대체 얼마나 늙으셨고
변모하셨을 지도 궁금하다 못하여서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그리운 아버지를 다시 찾아가는 길이 왜 그리도
낯설고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닌 알지 못하는 불안과
초조로 일관되었는지 모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어둠이 내린 기내에서 바라본 캘거리는 과거의 모습이 아닌
새롭게 발전하고 시의 크기가 크게 달라진 모습에 어느덧
큰 도시가 되어 있었다. 바로 착륙 직전에 기내에서
그 멋진 전도시의 아름다운 야경을 디카에 넣는 것을
잊고 말았다. 공항도 옛 모습이 아니었다.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면 돌아가던 그런 지난 세월 속의 옛 모습이
아니었다.

착륙 후 기내를 나와 짐을 찾고 출구를 나가는데 아니
이게 왼 일 아버지가 시야에 안 보이는 것이었다.
잠시 어떻게 하여야 할까하고 생각하는 순간 저쪽에서
이름을 부르면서 어느 하루 365일 잊어 본적 없는
꿈에도 그리운 아버지가 다가오시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따라서 겨울옷이 가득 든 가방을 갖고 주차장으로
가서 짐을 싣고 어둠이 내린 길을 따라서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얼마만 인가 그리움에
긴 포옹을 서로 교환하고 북경 식 요리를 하는 식당으로
아버지가 운전을 하시고는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어찌나
그 추운 영하의 날씨에 바쁘던지 대부분이 캐나다 백인들뿐
중국계인 우리 부모님과 그분들의 한국인 아들인 자신만이
다른 중국인 가족들과 동양인의 모습이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나니 그전에는 하시지 않던 맥주나 와인을
마시지 않겠느냐고 권하신다. 물론 어쩌다 마시는 경우의
술이라고 하여도 어찌 늙으신 아버지 앞에서 감히 매너 없이
술을 마시랴 싶었다. 단호히 거절하고 오랜만에 따듯한
차를 마시면서 그리운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 앉아 있을 수가
있었다.

아버지가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젊은 날부터 외로운 영혼
거두어 주셨지만 이제는 다행인지 아직도 흰 머리카락
하나도 없으신 대신 눈썹이 하얗고 뒷머리와 위에 머리가
좀 빠지신 모습이 왠지 모르는 쓸쓸함과 아픔으로 다가오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겨울이었고 이제 연로하셔서 겨울 여행을 단호히 반대 후
그냥 우리는 같이 시간을 최대한으로 보내는 것으로 결정하고
차이나 타운에 가서 늘 그러셨듯이 신문 사러 가고 그리고
샤핑 몰에 가서 구경하고 가다가는 앉아서 커피를 사서
같이 마시면서 그동안 쌓이고 쌓인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이면 캘거리에서 최고 중국음식을 잘한다는 중국 음식점을
순례하고 점심을 때로는 일본 집에서 들기도 하고 하면서
참 많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었다. 그것이 그동안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가장 배고픈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이번에 올라가면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동안 한국어와 문화 지키게 인도하여
주시고 돌보아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늘 가슴 한켠에 미제로 남아 있었던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양부의 어린 시절 성장기 이야기를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왠지 그것이 늘 가장 자신을 괴롭혔고 알고
싶었다. 어느 날 오후 샤핑 몰에 다녀오면서 꺼내고 말았다.
이대로 그냥 휴가를 같이 보낸 후 캘리훠니어로 돌아갈 수가
없다 싶었다.

집에 돌아와 잠시 응접실에서 쉬는 동안 아버지가 소파에
앉으시더니 갑자기 말씀을 꺼내시는 것이 아닌가.

"예야, 네가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알고 싶다 하였니...."
"네, 아버지.............알고 싶어요......."
"우리 음악을 좀 들을까....."
"네 그렇게 하죠........"

아버지는 서재로 들어가셨다......
아버지는 낮에 차안에서 학부시절에 카셋 테입에 녹음하여서
보내주셨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2번과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이 참으로 좋았었고 그 후 참 평생을 두고 즐기게
되었노라고 한 이야기를 기억하시고는 교향곡 6번 LP 판을
트시는 것이 아닌가....한참 즐기려는 차에 이게 아니라면서
아들이 더 즐겨 듣는 곡을 먼저 들어야 한다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를 트시는 것이 아닌가.

음악이 다 끝난 후 아버지는 낮은 의자에 앉으시고 자신은
아버지 서재의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예야, 나는 중국 남부 광동지방의 수도 광주에서 태어났어...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큰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나는 그 당시
풍습에 따라서 큰아버지한테 입양이 되어서 양자로 갔었다.

그래 어머니가 되신 큰어머니를 따라서 일본군들이 들어 올
수 없는 마카오로 피난을 갔지. 그리고 전 후 광주로 돌아가
학부에서 경제학을 하였어................"

"네.......아버지.......아니 생화학을 하셨다면서요........."
"아니 네가 잘못 알고 있었다.............그것은 너와 동갑인
동생 스티븐 이야기이고.....그리고 나는 정부장학생으로 선정되어서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로 가서 사회 사업학으로 학위를 받고 돌아가
보건사회부에서 근무하였단다. 그리고 지금은 캐나다인이 되어서 살아
가는 것이고...................."

"아버지..............그러면 형제는 있으셨어요........"
"그래 2남 2녀에 내가 장남이었단다....."
"아버지.......작은 아버지가 영국에 산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래 영국에서 항공학 엔지니어로 근무하다가 은퇴하고 지금은
밴쿠버에 두 여동생들과 같이 살고 있단다. 그리고 나의 생모님도
그곳에서 사시다가 지난해 돌아가신 것이고....."
"아버지, 그러면 그분들과 같이 성장하셨나요......."
"아니다, 어머니인 큰어머니와 성장하였단다.........."
"아버지.......아버지...이제 그만 듣고 싶어요...
모든 것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아요......아버지의 모든 마음을요.....

"너 우니............"
"그러니까 이젠 동생들과 제가 해드리는 것 제발 반대 좀 하시지
마세요....남은 인생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세요......아버지, 나중에
이 아들 후회하게 만들지 말아주세요.....제발 부탁이어요......."

"예야, 내 은퇴 연금 충분하고 불편하지 않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언제고 나오는 거란다.
전혀 돈 걱정 없다."

"아버지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도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아버지 살아 계셔서 잘해드리고 싶어요. 돌아가시면 어떻게
무엇을 하겠어요. 아버지가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셔서 사랑하여
주시고 그리고 인도하여주시고 모든 것을 바친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지요.

아버지, 우리에게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제발 부탁이어요. 아버지 고마워요.....
저를 이렇게 한국인으로 지켜주셔서요.
한국인도 못한 것을 이방인이신 당신은 이렇게 저를 지켜 주셧잖아요.

죽어도 저는 아버지 은혜를 못 가 퍼요.
그것이 돈으로 계산이 가능한 일이 아니잖아요.
대신 아버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아버지처럼 타인에게 따듯한
사랑과 관심과 도움으로 조건 없는 배려를 베풀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 역시 더도 들도 말고 아버지처럼만 남은 인생을 정갈하고
깨끗하고 인생을 알차게 즐기면서 여유롭고 지성적인 모습으로
아름다운 사람들과 더불어서 살아가고 싶은 것이 소망이지요.
그리고 존엄성과 지존을 지키고 인생의 품위를 지켜가면서요."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있어요.
누가 명성과 권력과 어마 어마한 부를 갖고 있어도 저는 그들이
아버지 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하여 본적이 없어요. 아버지가 제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인생과 품위와 지성만으로도 아버지는
누구 못지 않게 훌륭하세요. 그래 좋은 벗도 많으시고 지금도
많은 연락이 오잖어요."

"예야....내가 그런 자격이 있겠니......................."
"아버지..............뭔 말씀이세요.....당연하지요.
그리고 아버지의 유년을 알게 되어서 인생의 숙제가 끝난 기분이어요.
아버지가 저를 낳아 주셨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보아요.
다만 중요한 것은 제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는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셨는지 알고 싶었지요.
아마도 그것이 저에게는 아버지가 부어주시는 조건 없는 모든 사랑과
희생과 보살핌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이 될 것 같아요.

아버지, 제게 모든 이야기 들려주어서 고마워요.
더는 아버지도 저도 아파서 안 물어볼래요.
그리고 알고 싶지 않아요......이정도면 되었어요.
다시 태어나도 아버지 아들로 있고 싶어요.

아버지가 여태까지 제게 보내주신 모든 편지와 카드 다 박스에
보관하고 있어요. 남들이야 그걸 왜 모으느냐고 웃지만 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아버지의 모든 것이지요."

"예야, 오늘 네게 들려준 이 아버지의 유년을 아는 사람은
단 몇 사람밖에는 없단다...."

"아버지, 되었어요.......우리 그만 그 이야기하기로 해요.
앞으로 남은 날들 아버지 온전히 저의 모든 영혼과 사랑으로
어떤 값을 치르던 지켜드릴게요.....어머니나 아버지 신상에 조금이라도
건강등 중대한 기로에 서시면 즉시 동생시켜서 연락하셔야 해요.
열일 제쳐놓고 비행기로 날아 올게요. 잊지마세요...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시면 저 후회하게 만들지 말아주세요.....제발 부탁이어요."

"그래 그렇게 하마......."
"아버지, 그리고 누구 보고 80 다 되어간다 하시지 마시고요.
아버지는 70 정도 밖에는 안 보이세요....."
"너 지금 행복하니..........."
"아버지,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좋은 인연들 국내외로 손에 꼽을
만큼은 있어요.....간절한 그리움으로 저를 그리워하는 분들이요...
축복으로 생각하지요. 그리고 아버지를 갖게 된 것도 제 인생에
가장 큰 축복으로 생각하지요......"

"참 대학원 다닐 때 아버지가 보내준
편지 중에서 너의 사랑이 내가 낳은 두 아들의 사랑보다
더 크다고 하셨을 때...............

아버지, 전 그날 하루종일 그 편지 보고 울었어요.
물론 그말이 아버지가 낳은 동생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닌줄 알지만 세상 어느 부모도 그런 냉철한 이성과
객관성으로 바라보고 솔직한 이야기를 토로한 적이 없거든요.
아직 제 경험으로요. 그런데 아버지는 하셨지요. 동생들 한테
죄를 지은 기분이었기도 하였지요."

이렇게 긴 대화는 끝이 나고 차이나 타운으로 나가서
그날 아버지는 상어지느러미 숩과 더불어서 새로운 진미의
음식을 저녁으로 주문하셔서는 옷자락이 음식에 닿는 것도
모르시고 아들 접시에 음식을 가져다 놓으시며 더 먹으라고
권하시곤 하셨던 아버지.......................

떠나오던 날은 새벽처럼 일어나셔서 잊은 물건이라도 있나 싶어
챙겨주시고 슈퍼에 가자고 하시고는 지방질 덜하고 한 랙토스가
덜 들은 우유도 사셔서는 돌아오셔서 아침에 마시는 차에 부어주신다.
우유제품에 일종의 앨러지가 있어서 마시지 못하는 아들을 배려하심
이리라.....토스트 구워주시고.......같이 조용히 어머니와 응접실에
앉아 있는 시간은 흘러서 출발하자고 하신다. 같은 날 아버지
친구 분과 같이 점심 식사 약속이 되어 있으셨다. 친구 분이 홍콩을
가시게 되어 아버지를 만나보고 가시겠단다.

어머니와 작별의 인사를 하는 동안 포옹하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슬픔이 내리고 있었다. 돌아서기 조차 싫은 발길을 돌리면서 어머니
볼에 키쓰를 하여드리곤 아버지를 따라서 지하실 차고에 도착하여서
짐을 싣고 출발하니 옆을 바라보셨는지 한 말씀 하신다.

"너 지금 우니.........우리 다시 볼건데 뭘.............."
"아버지........................"
"그래 내가 안다 네 심정을......떠나고 싶지 않음을.........
"예야, 나도 유년시절은 참 외로웠단다."

"아버지.............아버지 마음을 알아요......."
"아버지, 앞으로는 그전처럼 매달 편지하고 매주 전화드리도록 할게요.

컴퓨터 시대가 지난 3년간 평생 아버지와 함께 어느 곳을 가든
서로 주고 받던 글을 드리지 못하게된 주된 원인이었어요.

이번에 와서 느낀 것은 죄책감이었어요.
아버지는 동생 곁에 계셔도 이 한국인 아들이 또 채워드려야 할
공간이 있씀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꼭 지킬게요.

저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어요.
아버지는 영원한 저의 아버지이시고요.
아버지, 저는 한국인들이 말하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싫어요.
저는 물이 때로는 피보다 몇배 짙다고 말하고 싶어요. 아버지는
그러셨으니까요......"

"그래 고맙다........내리자........."
출구에 도착하여서 탑승 수속을 하려니 이름표 달아야 한다고
갖고 오시고....가시라고 하여도 한사코 좀더 있다 가시겠다 하신다.
줄에 이제 서라 하시며 이별의 포옹을 하여주신다. 아버지 손을 만지니
악수를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셨나 보다.

두 손으로 주름진 아버지 손을 만져보곤 손등에 마지막으로 굿바이
키쓰를 하여드리니 어서 줄에 서라고 재촉하신다. 줄에서니 다시
옆으로 다가오시더니 한 마디 하신다.

"I Love You"

발길을 돌리시곤 떠나가신다.
쏟아지는 눈물을 이를 악물고 삼키고 떠나가는 아버지 등 뒤를
바라보고 있으니 역시나 아버지는 끝내 다시 한번 뒤돌아 보시고는
총총히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