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자두 향과 짙은 적색 앵두 향이 가미된 적색 포도주 양고기 내지는 오리고기와 가장 적합하게 어울릴 수 있는 서민적인 적색포도주일지 모르겠다. Pinot Noir 부르조아적인 낭만의 술잔일까?
Cabernet이나 Merlot 보단 부드러워서 대하기 편한 적색의 Pinot Noir 적색포도주 요즘은 구라파의 한다 하는 양조업계도 뛰어들어 투자가치를 높이고 있는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포도주 생산지 대명사로 포도주 시장에 떠오르는 그 이름 적색 포도주 Pinot Noir 지독히도 관능적이며 유혹적이다.
하나의 참사랑을 위하여서 아흔 아홉의 보편적인 만남과 일상의 인연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존재의 가치를 양보다는 질로 판단하는 사유의 척도와 같은 관능미 내지는 순수미를 지니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어디까지가 가증스러움과 자기기만과 위선의 한계일까? 어느 시대이고 진실과 그렇지 못함은 인류역사가 열린 이래 공존하였다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보편성과 객관적 시각과 행동양식을 일치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열명의 인간군상 속에서 하나의 의인을 찾으면 천만다행인 이 시대의 상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죽음을 싫든 아니든 맞이하게 되어 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오만과 자기기만과 독선으로 종지부를 찍는 인생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부귀영화가 편리함이나 안락의 도구는 될 수 있을 지 언정 존재가치에 대한 절대 부여의 요소는 결코 될 수가 없다 하겠다. 흔이 우린 목자라면 선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의사 정도로 치부한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과 타락상 위에 우리 같은 필부의 시각에는 그들 또한 하나의 인간이란 그 존재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다음이 그들이 목자란 이름을 갖고 사는 현실이라 생각한다. 동시에 우린 사랑 사랑 허구 헌 날 노래를 하다 못해 신파조의 타령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실체에 한 발짝 다가가 보면 우린 앵무새처럼 가증스러운 세치의 혀와 물기도 없는 입술로 사랑이 어쩌고 저쩌고 언어유희로 난무하고 있다.
이 시대에 지옥을 제일 먼저 가야 할 명단을 기재한다면 놀랍게도 일반인의 상식을 깨고도 남게 목회자 내지는 장로나 권사들이 생각 이외로 많이 차지 하지 안을까 생각한다. 동시에 중이나 기타 일단의 성직 위에 자리하고 있는 절대 다수의 인간군상들이 아닐까 싶다.
민중의 피와 땀 위에 무위도식하거나 지배적인 오만과 자아도취로 타인의 인권과 인격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이런 부류들이란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주변에서 목격할 수 있다.
진정한 봉사정신이 온전한 한 인격의 자기희생을 절대로 요구하고 있다는 진실을 부인 할 수 없다면 동시에 진정한 봉사와 사랑은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는 자기 낮춤이 앞서야 함이 아닐까 싶다.
불행하게도 봉사의 선봉에 서야 하는 자들은 이 시대에는 떠받들음만 늘 받아서 일까 그 아녀자들 까지도 절대 다수가 늙어서도 남을 공경하기는커녕 군림하거나 떠받드는 기대치에 오만과 자만으로 군림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쉽게 목격할 수가 있다.
반면에 오늘도 우리를 감동의 늪으로 빠트리는 목회자 내지는 각종 종파의 지도자들 그리고 봉사자들이 얼마나 많은 가. 그렇다 우리는 부정 보다는 긍정을 바라보아야 할 의무가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일상에서는 물론 의식이 있는 한은 죽음 앞에서 조차도 절대 겸손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자기가 뿌린 만큼 베푼 만큼 언행을 한만큼 대우를 받게 되어 있다. 죽음 그 뒤에서 조차 손가락질 받는 인격과 인생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 까?
잠시 쉬는 동안 만난 지성들은 다름 아닌 재일교포 학자인 서경석씨가 엮은 20세기를 온몸으로 싸우며 살다가 간 현대 화가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간단한 비평인 “청춘의 사건” 과 아마추어이면서도 프로보다 더 프로인 풍월당의 대표인 정신과 의사이자 음악애호가인 박종호씨의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인생 여정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구원처럼 내 생애에 다가온 한 분의 사색과 그 삶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시간들이었다.
허무의 끝을 잡는 만남은 순간의 기쁨은 있을 지언정 내면의 충만이 없기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인간 본질 자체가 고독이요 외로움이라면 구태의연하게 그 존재의 본질인 인간의 고독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온몸으로 부딪쳐 가며 그 고독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 더 높은 승화로 가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향기는 진실에 있다. 말로만 하는 사랑과 지성의 가증스러움 더 나아가서 우정과 사랑조차도 방자하다 못하여서 구역질 나는 일이다. 孝와 지고 지순한 순정이나 순수를 상실한 이 시대 제 자식 배설물은 치고 빨고 물어도 제 부모 제 주변의 사랑이 병들어 아파 누우면 얼굴 빠끔하게 내밀면서도 쉽게 표현하여서 오줌이나 똥이라도 지리면 얼굴 돌리고 내빼는 모습의 가증스러움 위에 우리가 감히 사랑을 논할 수가 있을까? 그 부모가 우리를 어떻게 양육 하였는가를 생각한다면 참사랑과 우정 역시도 철저한 자기희생이다.
그 똥과 오줌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날 생의 마지막 사랑으로 헌신하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날 우리는 진정으로 참사랑을 깨닫고 온몸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간은 지극히 기회주의적 이며 자기합리화에 익숙하다. 야누스적이다.
신성한 노동 위에 막걸리 잔을 기울이시는 삶 자체가 하나의 문학이요 예술인 인생의 진솔한 벗 목로주점 아우님 그분의 진솔한
사색이 그리운 날이다. |